[돋을새김] 라면 한 그릇이 말하는 것

김찬희 2023. 4. 25.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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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제법 오는 봄날의 일요일 낮이었다.

지금은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지만, 늘 부족한 양에 식은 밥까지 말아야 했던 그때의 맛이 잊히지 않는다.

와인 한 잔이나 스테이크 한 접시에 근사함을 느끼고, 잘 꾸며진 식당에 앉으면서 먼 이국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즐기기도 한다.

'바다의 반도체'라고 불리는 김은 단백질, 섬유질, 비타민 등이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한국의 슈퍼푸드'로 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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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희 산업1부장


비가 제법 오는 봄날의 일요일 낮이었다. 처마에서 줄기줄기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을 맞아가며 아버지는 부엌에서 방으로 그릇과 수저들을 옮겨왔다. 밥상 위에 놓인 양은냄비에선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네 식구가 게눈 감추듯이 면에 이어 김치, 파, 달걀을 넣은 국물에 식은 밥까지 말아 먹고 나자 비는 잦아들었다. 마당 수돗가 주위로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며 지나갔다.

아직도 라면을 보면 아버지가 끓여주곤 했던 김치 많이 넣은 라면과 지붕을 요란하게 때리는 빗소리, 젖은 흙냄새가 떠오른다. 지금은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지만, 늘 부족한 양에 식은 밥까지 말아야 했던 그때의 맛이 잊히지 않는다. 음식은 맛으로 먹지만, 추억 혹은 열망으로 먹기도 한다. 때로는 향유의 대상이 된다. 와인 한 잔이나 스테이크 한 접시에 근사함을 느끼고, 잘 꾸며진 식당에 앉으면서 먼 이국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즐기기도 한다.

1963년 라면의 첫 등장은 서민의 끼니 대용이었다. 먹고 살기 힘들던 시절을 지나, 짜파구리나 불닭볶음면 같은 다양한 변주까지 거치면서 어느덧 143개국으로 뻗어 나가는 수출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2011년 2억 달러 수준이었던 라면 수출액은 지난해 8억6200만 달러까지 치솟았다. 올해 1분기에 수출액은 2억800만 달러로 농수산식품 가운데 최대 실적을 거뒀다. 라면뿐만 아니다. ‘바다의 반도체’라고 불리는 김은 단백질, 섬유질, 비타민 등이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한국의 슈퍼푸드’로 소개되고 있다. 김치, 인삼, 배, 미역 등의 농수산식품도 힘을 낸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지난해 농수산식품 수출액은 120억 달러에 달했다. 2021년 114억 달러보다 5.3% 증가하면서 사상 최대치 기록을 경신했다.

음식은 생존이라는 절박함에서 출발했지만, 요리라는 행위를 거치고 시간을 삭히면서 문화로 성장한다. 미국의 햄버거, 일본의 스시, 태국의 똠얌꿍, 프랑스의 와인, 이탈리아의 파스타는 그 나라를 떠올리게 하고 그 나라의 문화를 먹고 마시게 한다. 일종의 명품 인증 딱지, 프리미엄 라벨이 붙은 ‘문화’라는 근사한 옷을 입는 것이다. 한국의 농수산식품도 K팝, K콘텐츠로 대표되는 한류 열풍을 등에 업고 ‘음식 자원’이 아니라 ‘음식 문화’로 그럴싸하게 진화하고 있다.

문화는 단기간에 극적인 성과물을 내지 않고 긴 시간에 걸쳐 깊게 스며든다. 문화의 수출은 쉽지 않지만 한 번 인이 박이면 오래 간다. 콘텐츠로 시작해 농축수산물, 가공식품, 공산품을 아우르는 거대한 그물을 짠다. 수출로 먹고살 수밖에 없는 한국이 제조업 강국에서 문화 강국으로 발돋움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불안의 불씨도 함께 자란다. 평균 70%에 이르는 성장률을 보이던 K팝 음반 수출액은 지난해 4%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반(反)한류의 바람이 불고, 한류를 정부 주도의 관제 상품으로 여기는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15년 전쯤 해외 취재 현장에서 만난 한 외신기자는 “안타깝지만 한국은 졸부, 벼락부자(upstart) 느낌을 준다”고 했었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국은 품질 좋은 물건을 많이, 잘 만드는 나라이지만 여전히 ‘인색한 나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공적개발원조(ODA) 통계를 보면 한국은 지난해 국제사회에 무상·유상원조로 27억9000만 달러를 내놓았다. 일본(175억 달러)에 턱없이 못 미친다. 하나의 문화가 세계인의 머리와 입에 오래 머무르려면 여러 노력이 들어간다. 그중 가장 핵심은 ‘품위 있는 나라’ ‘근사한 나라’라는 인상(印象)과 이야기를 심는 게 아닐까. 인덕션에 냄비를 올리며 온갖 생각을 함께 끓인다.

김찬희 산업1부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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