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뜨락에서] 생에 한 번 피는 꽃

2023. 4. 25.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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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가 뱅그르르 돌더니 내 마음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한마디 말일 뿐인데 참 무겁게도 흔들린다. “내가 사는 곳이 단지 세상의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느끼지 못했어.” 여행을 두고 이야기하던 중 무심코 내뱉은 딸의 말이었다.

손끝의 진동이 찻잔으로 향하더니 힘없이 식탁 위로 내려앉았다. 잔물결 치던 향긋한 자연이 일순간에 코끝을 찌르더니 사라진다. 마음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아쉬운 미련이 건드렸다. 여행. 나에겐 묻어 둔 아픔이다. 개척의 사역 속에 홀로 숨어버린 딸의 나날들이 그 안에 있다. 아빠의 품에서 세상을 읽고 작은 발자국이 자랄 때까지 여행의 자리는 삶의 터전 위였다. 자신이 정한 시간대로 움직여 주는 하루를 만나고 나의 말을 따라 주는 시간에 풍경을 넣는 일. 그날의 순간을 다 기록하지 못했더라도 기억이 자신을 이룬다는 걸 알아가는 시간여행들. 그리고 말 없던 풍경에 듣는 뜻밖의 대답. 딸들의 인생에 형편이라 말하면서 너무도 멀리 뒀다.

올해도 2월의 끝자락에 매달린 겨울은 한 꺼풀 더 두꺼운 미련이었다. 포말을 이루는 옥색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듯한 수평선의 두두룩한 물마루. 제주의 풍경을 보고 싶어 했던 딸들의 바람은 아쉬운 기다림으로 또 다른 봄을 맞이했다. 그래서일까. 봄 햇살에 빛나는 연둣빛 잎새는 애잔함이었고 햇살 한 자락 바람 한 줄기에 미소 짓는 딸들의 모습은 그리움이 되었다. ‘여행이 시간을 벌어오는 일이어서 그래’ 스스로 위로했지만 마음에 떨어진 말 한마디가 큰지 쉽게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엄마, 갑자기 왜 그래? 말도 없이.”

틸란드시아 이오난사라는 식물이 있다. 공기 중 습기와 미세먼지를 먹고 산다. 평생에 딱 한 번 꽃을 피우고 꽃이 지면 자구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번식으로 이어가는 식물이다. 얼마 전 치과 원장실에서 이오난사를 봤다. 작은 파인애플 잎처럼 생긴 식물은 흙도 없는 원반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었다. 초록의 작은 아이가 흙 한 줌 없는 나무 원반에서 그 긴 세월을 살았다는 것이 놀라웠는데 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친구의 당부로 물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원장님이 물 없이 살아가는 이오난사가 불쌍해 작은 구멍을 원반 위에 뚫었다. 그러곤 구멍 속에 물을 넣고 이오난사를 올려놓았다. 어떻게 됐을까.

잎이 갈변을 이루더니 죽어갔다. 이오난사는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든지 아니면 2주에 한 번 가득 찬 물그릇에 시간을 재어 담가둬야 하는 식물이었다. 특이하게 뿌리로 물을 흡수하지 않고 잎에 붙어있는 하얀 가루의 털 트리콤이 습기와 미세먼지를 먹었다. 물에 담가진 이오난사가 다시 화분에 놓이려면 바람에 물기를 말려야 할 정도로 과한 습도에 약한 아이였다. 이오난사는 진료실 옆 창틀에 놓였다. 자신이 살아갈 환경을 이해받지 못한 채 10년을 훌쩍 넘겼다. 생각건대 죽지 않았던 이유는 치과의 특수적인 상황이 자연스러운 환경이 되어 목마름을 이겨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일생에 한 번 피는 꽃은 피워 내지 못했다. 새삼스레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왜 그렇게 좋은지. 하나님이 나를 잘 아신다는 것과, 그 하나님이 나를 돌보고 계심이 신기할 정도로 감사했다. “엄마 슬퍼하지 마. 언니와 나는 일상을 향유하며 감사하게 살아. 비록 넓은 세상을 보지 못했지만 마음이 행복하고 기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단 더 많은 세상을 느낄 수 있어.” 며칠 전 슬퍼했던 나를 위로하던 딸들의 말이다.

삶의 터전 위 자연 속에서 꽃과 나무와 하늘과 사람을 보며 기다려 주는 행복을 품는다고 말했다. 멀리 떠나는 여행은 부족했지만 가족이 머문 곳이 푹 담가진 하나님의 환경임을 느낀다며 마음을 믿음으로 담았다.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누구나 느낄 수 없는 세밀한 비밀이 있는 하나님의 세상.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을 수 없다.’ 어제 마음 아파했던 니체의 문장을 오늘 은혜로 채운다.

장진희 그이름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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