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수의 시시각각]미국은 무슨 청구서를 꺼내들까
동맹 중시하되 상대 목적은 알아야
동맹은 목적 아닌 국익 창출 수단
2019년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려운 격변의 시간이었다.”
1900년대 초 기별지(정보지)를 몰래 접하던 양반집 규수 고애신이 혼잣말로 시대를 묘사하는 장면에서다. 소식지엔 미국과 일본, 러시아 등 열강들의 다툼이 치열했던 당시 상황이 빼곡했다. 하루하루 대한제국의 운명을 예상하지 못하던 그야말로 격변의 시간. 수를 놓고 난을 치며 꽃처럼 살 수 있었던 고애신은 ”불꽃처럼 살겠다“며 의병의 스나이퍼(저격수)로 나선다.
백척간두였던 한반도는, 그중에서도 반쪽인 한국은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지닌 기적의 나라가 됐다. 하지만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정세는 100여 년 전을 떠올린다. 어제가 멀다고 느낄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우리의 의지이건 아니건 오늘은 낯설다. 내일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렵다.
당장 최근 한 달만 보자. 미국이 한국을 도·감청한 사실이 공개됐다. 미국은 전기자동차 보조금 대상에서 한국차를 제외했다. 중국이 미국 마이크론의 반도체 판매를 금지할 경우, 그 공백을 한국 기업이 메우지 않도록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사실이라면 우리 기업의 발목까지도 잡겠다는 뜻이다.
비어 있는 물 잔을 우리가 먼저 채우면 나머지 반을 채울 것으로 기대했던 일본은 어떤가. 윤석열 대통령이 일부 국내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호의적으로 다가갔지만 일본은 아직 미온적이다. 일본은 오히려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표현을 교과서에 버젓이 실었다. '화이트 리스트'(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국) 문제만 해도 일본의 행보가 한국보다 늦다. 오히려 한국이 어제(24일) 먼저 일본에 화이트 리스트 원복 조치를 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한·일 양국의 뜨거운 감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한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경계하며 외교적으로 협박한다. 미국과 각을 세우고 있는 중국은 ”불에 타 죽을 수 있다“며 한술 더 뜨고 있다. 핵과 미사일 위협이 일상이 돼버린 북한은 두말할 것도 없다. 양자 외교조차 벅찬데 진영 외교와 경제 문제가 덧붙으니 숨이 막힌다. 위안은 한·미·일 군사 협력만큼은 잘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의 위협이 고조되며 확실한 교집합이 생긴 거다.
12년 만에 미국을 국빈방문 중인 윤 대통령이 안보와 경제 분야에서 성과를 낼 것으로 기대된다. 북한이 한국에 핵을 사용하면 미국이 가진 핵으로 보복한다는 일종의 ‘대위 확증파괴’, 즉 한국형 핵우산을 문서로 확인하는 방식이 거론된다. 조건부이긴 하지만 미국이 막았던 중국 내 한국 기업의 반도체 공장 업그레이도 가능해질 전망이다. 윤 대통령은 미국 방문 기간 정상회담은 물론 상·하원 합동 연설을 한 뒤엔 미군 수뇌부의 정세 브리핑을 받는다. 이 밖에도 미국의 ‘극진한’ 예우는 여럿이다. 윤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한국의 기댈 언덕을 공고히 하고, 산적한 고차 방정식을 풀어 나갈 발판을 마련하는 셈이다. 양자이건, 진영이건 열강들과 맞대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고, 협력을 강화하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다.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향후 미국의 청구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당장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한국의 역할 확대를 주문받거나 미·중 사이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다시피 하는 상황을 마주할 가능성도 있다. 빛 샐 틈 없는 한·미 동맹은 조율과 협조가 바탕이어야 하는데, 그런 청구서들은 국내외적 갈등과 큰 정치적 부담을 안겨줄 수도 있다. 동맹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동맹의 목적은 국익이다. 한·미가 협조와 조율을 통해 격변의 시대를 슬기롭게 넘기고 100년 뒤를 대비하는 공동 기획자가 될 때, 70년 전 피를 나눈 보람이 느껴질 것이다.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jeong.yongs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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