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그래도 어쩌다 한 번씩 기적은 일어난다

2023. 4. 25.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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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사람들은 기적을 바란다. 왜 아니겠는가. 이 삶에서 안식을 얻기가 어려운데, 어딘가 깊은 곳이 상처 입었는데,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데,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는데, 왜 기적을 바라지 않겠는가. 그래서 가끔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고, 기적을 기다린다. 어느 날 불현듯 눈앞에서 나타날 기적을 기다린다.

「 번아웃에 지쳐가는 하루하루
가끔은 기적을 바라지 않는가

불안에서 벗어나려 돈을 버나
악수 가득한 인생이란 바둑판

북토크에서 받은 작은 손편지
사람 사이의 공감, 그 드문 기적

우리 삶도 ‘오마카세’가 유행인가

생각의 공화국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일상은 계속된다. 그토록 과학 기술이 발전한다는데, 한국이 선진국이 되었다는데, 어째 내 삶을 내 손으로 통제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가. 삶도 ‘오마카세’(お任せ, 먹을 메뉴를 요리사에게 일임하는 식사방식)가 유행인가. 세상이 주는 삶을 그대로 받아먹어야 하나. 나는 이 세상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녀가는 건데, 이 세상의 단골은 아닌데, 이 세상 뜨내기손님에 불과한데, 이 세상이 내 구미를 알 리가 없는데, 이 세상은 자꾸 나 보고 주는 대로 먹으라고 한다.

스스로 통제하지 않는 삶은 남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탄 것과는 사뭇 다르다.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뿐. 자칭 엘리트들이 모여 자청해서 부패하는 사회에서, 자칭 엘리트들이 모여 자청해서 무책임해지는 사회에서, 그 자칭 엘리트에게 안심하고 사회의 운전대를 맡기고 창밖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사고가 나도 크게 다치지 않을 고급차를 사고 숙련된 운전기사를 고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 휠체어를 탄 사람이 공공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너무 큰 결심을 해야만 하는 사회가 여기에 있다.

잘난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삶을 통제하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너도나도 말하는데, 월급은 조금 오르고 삶의 비용은 많이 오른다. 쉬지 않고 벌어야 한다, 라고 자신에게 속삭인다. 무엇을 하고 싶기에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벌고 있지 않다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삶의 순간들을 포기해야 하는 나날들이 이렇게 늘어난다. 삶과 돈을 교환하기도 지친 한국인에게 마침내 번아웃의 파도가 밀어닥친다. 그 파도 위에서 느긋이 서핑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떤 영양제를 더 먹어야 버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주말 아침이 밝는다.

번아웃에 시달리는 육신에 영혼의 존엄은 좀처럼 깃들지 않는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는 시들고, 잘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만 남는다. 잘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도 시들고, 잘나 보이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만 남는다. 잘난 사람이 되는 데 실패하면 분발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잘나 보이는 사람이 되는 데 실패하면 토라지는 마음이 생긴다.

왜 이리 잘난, 아니 잘나 보이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 거지! 잘나 보이는 데 실패한 사람들은 오늘도 하염없이 토라져 간다. 이제 고요함 속에 자신의 존엄을 길어 올리는 일 대신, 남을 무분별하게 비난하면서 자기 존재의 존엄을 찾으려 드는 사회가 되어 간다.

아파트 경비원에 왜 갑질하나

과로로 인한 번아웃의 공포가 드리운 사회에서는, 돈으로 많은 것을 살 수 있다. 돈으로 편의를 사고, 돈으로 쾌감을 사고, 돈으로 학벌을 사고, 마침내 도덕을 금전으로 바꿀 수 있는 사회, 제정신을 금전으로 바꿀 수 있는 사회가 되어 간다. 돈이 없을 때 굴러떨어질 어두운 골짜기를 상상하며, 두둑한 잔고를 자랑스레 인증하는 사회가 되어간다. 그 인증에 환호하는 사회가 되어 간다. 그 환호로 자존심을 높이는 사회가 되어 간다. 잔고를 늘리는 데 실패한 다수는 자신이 두어 간 인생의 악수(惡手)들을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악수로 가득한 바둑판이지만, 바둑판을 엎고 게임의 룰을 다시 만들 배짱은 없다.

두둑해진 잔고를 털어 그럴듯한 아파트를 사게 되더라도 마음은 여전히 존재의 자갈밭을 터벅터벅 걷는다. 존엄의 번지수를 잘못 찾아 경비원에게 ‘갑질’하는 사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가짜 존엄에는 평화가 깃들지 않는다. 가질 만큼 가진 사람에게도 평화는 없다. 아파트 가격이 내려가면, 모든 것이 헛일이 되고, 그 소중한(?) ‘갑질’도 이제 못하게 되니까. 그래서 추모할 수 없다. 갑질을 못 이겨 경비원이 자살해도, 아파트 가격이 내려갈까 봐 그 경비원을 추모할 수 없다. 추모 현수막을 걷어버려라!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놀라울 정도로 자식새끼 사랑(?)은 여전히 강고하다. 자기 자식에게 험한 일을 면제해주려고 외국인 노동자를 인권의 사각지대에 몰아넣는 사회가 되어간다.

인간은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자신을 통제하는 데 실패할 때마다 수치심이 밀려든다. 영혼의 번아웃처럼 밀려든다. 분발할 체력이 고갈된 영혼은 이제 울고 싶다. 그러나 다 큰 어른은 함부로 울지 않는 법, 사회에서 허용한 울 곳을 찾아 헤맨다. 장례식장에 가면, 자신의 수치심까지 담아 남들보다 더 크게 우는 사람이 있고, 대낮의 성당에 가면 어두운 구석에서 남들보다 더 깊이 흐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인간에게 너무나 무심한 우주

이 모든 것이 싫어진 사람들이 있다. 어쨌거나 아이를 낳고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라고 정부가 채근하기에, 더 깊이 이 모든 것이 싫어져 버린 사람들이 있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남을 착취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남에게 폐를 끼치기도 싫고, 남과 아귀다툼을 하기는 더 싫은 사람들이 있다. 주변 사람을 실망시키기는 싫은데, 주변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다. 삶을 개선할 방안은 시야에 보이지 않는데, 살아야 할 나날들은 눈앞에 엄연히 있다.

그래도, 다시 한번! 얼룩말처럼 용기를 내어 성실한 앞발을 세상으로 다시 내디뎌 보이지만, 이 우주는 대체로 인간에게 무심하다. 가까스로 용기를 낸 사람이 사랑하는 이의 부고에 갑자기 접하게 만드는 것이 이 우주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 이가 “정밀검진을 받아보셔야겠는데요”라는 진단을 듣게 만드는 것이 이 무심한 우주다. 소중한 사람에게 결국 상처를 주게끔 방치하는 것이 이 무심한 우주다.

이래도 기적을 믿고 싶지 않을 수 있을까. 기적을 믿는다고 하면, 머리통이 큰 사람들이 비웃을지도 모른다. 기적을 믿는다니, 그건 너무 비이성적인 일이군. 기적은 인민의 아편이지, 에헴. 그러나 삶이 이래도 기적을 믿고 싶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군가 한국에만 수십 명이라는 자칭 구세주를 믿는다고 할 때, 생각한다. 그들이 기적을 애타게 바라게끔 했던 생의 조건에 대해서. 그리고 나도 기적을 바란다. 매일매일 살아있는 게 기적이니까. 최상위권 자살률을 가진 사회에서 매일매일 살아있는 게 기적이니까.

그리고, 가끔 기적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어느 날 얼룩말이 예고도 없이 서울대공원을 탈출하는 거다. 거리를 한동안 우두두두 누비는 거다. 골목길에 들어선 배달 오토바이 청년이 초현실적으로 얼룩말과 마주치는 거다. 바로 그 순간 경기도 북부, 누군가 문득 참지 못하고 집을 탈출(?)하는 거다. 2시간 동안 차를 타고 수원의 강연장까지 북토크를 들으러 우두두두 오는 거다. 다행히 저자는 그날도 기적처럼 살아 있는 거다. 교통 체증에도 불구하고 강연은 제시간에 시작되는 거다.

수줍음 많은 남학생의 그림노트

대부분의 기대는 실망으로 끝나는 법. 그러나 우주는 어쩌다 한 번씩 저자와 독자 사이에 공감의 기적을 허락한다. 하필 그날, 인간 대 인간의 공감이라는 그 드문 기적이 예상치 못하게 일어나는 거다. 그리고 그 공감이 육화(肉化)하는 거다. 강연이 끝나자 다른 누군가 수줍게 정성 들여 쓴 손편지를 건네는 거다. 또 다른 누군가가 옆에서 다가와서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거다. “계속 써주세요.” 나직하게 말하고 홀연히 자리를 뜨는 거다. 보통 엄마가 만사 귀찮은 딸을 억지로 데리고 강연장에 오는 법. 그러나 앞줄의 여고생은 자기가 엄마를 강연장에 끌고 왔다고 자랑하는 거다.

이 모든 기적을 목도한 강연자가 이제 서울행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봄치고는 쌀쌀한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 기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주머니 한 명과 소년 한 명이 주춤거리며 주변을 맴도는 거다. 부끄러움을 너무 타서 얼굴도 못 드는 남중생을 데리고 엄마가 버스정류장까지 왔던 거다. 얘가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대요, 라며 그림으로 가득한 공책을 내미는 거다. 펼쳐진 공책 페이지 페이지마다 자신이 직접 그린 옛 철학자들의 초상이 가득한 거다. 수많은 그림마다 어린 얼룩말 같은 제목들이 낭자한 거다. “미친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 이 그림들 사진 찍어도 되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시 얼굴을 숙이는 소년이 수원 밤거리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거다. 마침내 서울행 버스가 도착한다. 이 모든 일이 다 현실이었다고 되새기는 버스 안, 그곳에 기적을 믿는 사람이 한 명 앉아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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