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은 멀고 코트는 가까워”테니스 전성시대 [스페셜리포트]
# 서울 광진구에 사는 직장인 김영진 씨(가명)는 올해 초 테니스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늘상 오가던 피트니스 센터를 벗어나 다른 취미 운동을 찾고 있던 와중, 동네 근처 새로 생긴 실내 테니스장에 절로 눈길이 갔다. 주 1회 레슨을 받다 최근에는 주 2회로 횟수도 늘렸다. 그는 “골프는 장비가 너무 비싸고 필드에 나가는 비용도 부담스러워서 애초에 생각도 안 했다. 반면 테니스는 라켓도 하나만 있으면 되고 최근 동네 소모임도 늘어나는 추세라 도전해보게 됐다”며 “얼른 ‘테린이’ 탈출에 성공해 코트에서 게임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테니스 전성시대’다. 최근 서울 테니스 코트 예약은 웬만한 ‘피케팅’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하다. MZ세대 사이에서는 테니스복을 입고 코트에서 인증샷을 찍는 게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뒤로 멘 가방 위로 삐죽 튀어나온 라켓 손잡이는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됐다. ‘테니스 예능 프로그램’도 새로 생겼다. 과거 낚시 방송, 골프 방송이 인기였듯 최근 테니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단적인 예다. 최근 한국에 불어닥친 ‘테니스 열풍’ 현장을 가본다.
저렴하고 쉬운데 ‘귀족 스포츠’
사실 테니스 열풍은 이미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2022년 9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테니스 경기장에 만원 관중이 운집했다. 여자프로테니스(WTA) 투어 결승전 그리고 이어 진행된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코리아오픈 결승전에도 1만명의 관객이 가득 들어찼다. 두 대회 모두 결승전에 한국 선수가 없는데도 이례적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 직접 경기를 관람했다는 직장인 박지혜 씨는 “생각보다 젊은 관객이 많아서 깜짝 놀랐다”며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비인기 종목이었던 테니스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날이 갈수록 테니스 인기가 부쩍 높아지는 모양새다. 단순히 관심이 커진 걸 넘어 실제 운동을 즐기는 ‘테니스 인구’도 크게 늘었다. 2021년 50만명이던 테니스 인구는 지난해 60만명으로 증가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 전국 100여개에 불과했던 실내 테니스 연습장은 지난해 700개까지 늘어난 것으로 추산된다. 24시간 이용할 수 있는 무인 테니스장이나 스크린 테니스장도 우후죽순 생겨난다. 테니스 용품 관련 시장도 급성장하는 모습이다. 업계는 2021년 2500억원이었던 테니스 시장 규모가 올해 3600억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무엇보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야외 운동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 근 몇 년 새 ‘골프’ 인구가 크게 늘어난 것과 비슷하다.
시간이 지나며 골프에서 테니스로 수요가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고가 장비, 라운딩 비용 등 경제적인 부담이 큰 골프에 비해 테니스는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뛰어나다. 고물가·고금리 등 경기 불황이 테니스에는 오히려 반사 이익이 됐다. 현재 시판되는 테니스 입문용 라켓이 5만원 내외, 테니스 코트 예약비용은 1만~2만원 수준이다. 실제 골프에서 테니스로 취미 생활을 바꿨다는 직장인 장지영 씨는 “골프는 한 번 라운딩에 필요한 돈이 많게는 50만원씩 들고 골프채 세트도 수백만원씩 한다. 반면 테니스는 코트 이용에 거의 돈이 안 들고 라켓도 하나만 있으면 된다”며 “라켓 면적이 넓고 테니스 공도 커서 골프보다 공을 때리기 쉽다는 점도 초보자 입장에서는 매력적”이라고 설명했다.
비용 부담이 덜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갖췄다는 점 역시 인기 요인이다. ‘귀족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한 데다 깔끔한 디자인의 테니스복이 MZ세대 취향을 저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는 ‘테니스타그램’ ‘테린이’ 등 단어로 태그를 달고 인증샷을 찍어 올리는 게 유행처럼 번져 나가고 있다. 서울 광진구에서 지난해 말부터 실내 테니스장 ‘아차산 테니스’를 운영하는 김근기 씨는 “회원 절반 이상은 2030세대다. 신혼부부나 커플로 와서 배우는 이들도 많다”며 “레슨 단위가 20분인데, 퇴근 시간인 6시 이후부터 10시까지는 빈 시간이 없을 정도로 문의가 많다”고 말했다.
테니스 인기는 예능 프로그램까지 번졌다. 국내 최초 테니스 예능 MBN ‘열정 과다 언니들의 내일은 위닝샷’이 주인공이다. 여성 연예인 테니스단을 구성, ‘한국 테니스 레전드’ 이형택 감독이 사령탑을 맡으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프로그램을 기획한 류승민 MBN PD는 “테니스라는 종목이 상당히 인스타그래머블한 종목이라는 판단이 들어 기획하게 됐다. 신규 유입되는 테니스 인구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에 착안해 여성 테니스단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테니스 용품 시장도 급성장
패션업계 너도나도 ‘테니스룩’
테니스 열풍은 자연스럽게 유통가로 번졌다. 특히 유행에 민감한 ‘패션’업계가 발 빠르게 움직이는 중이다. 너도나도 테니스웨어 라인을 강화하며 ‘테심’ 잡기에 나섰다.
브랜드 모태 자체가 ‘테니스’인 ‘휠라’가 대표적이다. 지난해부터 테니스를 중장기 핵심 종목으로 선정하고 관련 의류·용품 라인업과 물량을 대폭 확대해나가고 있다. 올해 3월에는 테니스웨어 ‘타이 브레이커 컬렉션’을 새롭게 내놓으면서 제품군 다양화에도 나섰다. 마케팅도 공격적이다.
최근 서울 광화문 육조마당을 거대한 테니스 코트로 꾸민 이벤트 ‘2023 화이트오픈 서울’을 개최하며 테니스 동호인 이목을 집중시켰다.
판매량도 급증했다. 올해 4월 휠라 공식 온라인 스토어 내 티셔츠 판매량 집계 순위에서 남·여 모두 ‘테니스 카라 티셔츠’가 1위를 차지했다. 특히 테니스 신발 ‘스피드서브 T9’은 휠라가 후원하는 한국 테니스 간판 권순우 선수 경기화로 입소문을 타면서 매출이 두 자릿수 이상 뛰었다.
코오롱FnC는 올해 4월 스포츠 브랜드 ‘헤드’를 3년 만에 다시 선보였다. 헤드는 ‘윌슨’ ‘바볼랏’과 함께 3대 테니스 라켓 브랜드로 꼽힌다. 2009년 첫 진출 이후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판매를 중단해오다 최근 테니스 열풍에 힘입어 재출시를 결정했다. 테니스 의류는 물론 라켓 등 용품까지 함께 취급한다는 게 강점이다. 최근 문을 연 ‘헤드 쇼룸’에서는 라켓 스트링 교체 서비스를 해주는 것은 물론 라켓 시범 타격 공간 등도 함께 운영한다.
‘디아도라’는 아예 직접 ‘테니스클럽’을 운영할 정도로 적극적이다. 브랜드 헤리티지를 직관적으로 알리기 위한 ‘체험 마케팅’으로 전문 코치에게 레슨도 받을 수 있다. 디아도라는 올해부터 선수급 퍼포먼스 라인을 강화하고 일상에서도 입을 수 있는 ‘테슬레저’ 룩을 선보이는 중이다.올해 봄부터 새롭게 테니스 시장에 뛰어든 업체가 여럿이다.
F&F는 올해 4월 온라인 쇼핑몰을 열어 이탈리아 테니스 브랜드 ‘세르지오타키니’ 제품을 본격 판매하고 백화점과 대형 쇼핑몰에 차례로 입점시킬 계획이다. 세르지오타키니는 1966년 이탈리아 테니스 챔피언 세르지오 타키니가 본인 이름을 따서 만든 테니스 브랜드다. F&F는 지난해 7월 세르지오타키니 글로벌 본사를 인수하는 등 공격적인 영업에 나서고 있다.
이 밖에도 애슬레저 브랜드 ‘안다르’는 신축성 원사를 활용한 고기능 테니스웨어 라인업을 올 4월 새롭게 선보였다. 한세엠케이가 운영하는 키즈 패션 브랜드 ‘플레이키즈-프로’ 역시 ‘나이키&조던키즈’에 브랜드 최초로 ‘테니스웨어 상하세트’를 내놨다.
부족한 테니스 인프라는 ‘과제’
지금 이 순간, 테니스가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취미 스포츠 종목 중 하나라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문제는 테니스 인기가 얼마나 이어질지다. 인기 지속 여부에 따라 관련 시장과 업계가 위축될 가능성도 없잖다. 골프 인기가 급격히 식으면서 중고거래 플랫폼에 골프채 매물이 쏟아지던 지난해 말 같은 상황이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일단, 테니스 관심이 본격화된 올해까지는 인기가 계속될 것으로 보는 이가 많다. 한 테니스 용품업계 관계자는 “최근 들어 테니스 동호회와 동호인 대회가 늘어나는 등 대중 스포츠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추세다. 모임과 대회가 이탈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면서 인기가 꾸준히 이어질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실력이 빠르게 늘지 않는다는 점도 이탈로 이어질 수 있는 요인이다. 테니스는 둘 이상이 함께하는 스포츠다. 기본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게임’은커녕 공을 주고받는 ‘랠리’도 어렵다.
실내 테니스 연습장에서 코치로 활동 중인 박은수 씨(가명)는 “테니스는 1년 이상 연습해야 코트에서 랠리가 가능한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다. 테린이들이 이 기간을 못 버티고 떠날까 봐 걱정”이라며 “반대로 연습만 열심히 하면 누구나 잘할 수 있는 운동이기도 하다. 포기하지 않으면 테니스의 진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테니스 선수 더 많이 나와야 인기 지속”
A. 코로나 팬데믹과 관련이 크다. 팬데믹 이후 운동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늘었고 또 상가 내 공실에 실내 테니스 코트 등이 많이 생기면서 테니스 초보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예쁜 테니스 옷을 입고 테니스 운동을 SNS로 인증하는 유행도 테니스 붐에 한몫한 것 같다.
Q. 테니스라는 운동의 장점은 무엇인가.
A. 전신 운동인 만큼 운동량이 많다. 다이어트에 특히 효과적이어서 여성에게 관심이 높다. 또 다른 장점은 ‘인간관계’라고 생각한다. 테니스는 팀플레이다. 서로 공을 받아 치는 과정에서 함께 운동하는 사람과 관계가 좋아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요즘 MZ세대 사이에서 ‘혼합복식’이 유행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본다.
Q. 그동안 테니스는 한국에서 ‘비인기 종목’으로 분류돼왔다.
A.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테니스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면적 대비 활용성이 떨어진다. 서울처럼 땅값이 비싼 지역에는 테니스장이 많이 생길 수가 없다. 최근 테린이가 늘어나면서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도 또 교육을 담당할 테니스 지도자도 없는 상황이다. 테니스 대중화를 위해 구조적·인적 인프라 확충이 절실하다.
Q. 테니스 열풍은 얼마나 지속될까.
A. 현재 테니스 유행은 ‘10년 전 골프 붐’ 때와 비슷하다고 본다. 당시 골프 이용자가 많아져 스크린 골프장이 늘어났고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골프 치는 이가 늘어나는 선순환이 나타났다. 지금 테니스가 그렇다. 다만, 테니스 인기가 더 지속되려면 좋은 선수가 많이 나와야 한다. 정현, 권순우 같은 엘리트 선수들이 여러 명 나와 유행을 선도해야 한다. 생활 체육만 갖고는 한계가 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06호 (2023.04.26~2023.05.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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