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지형이 흔들린다…예정된 공장 20곳 중 10곳은 ‘흐림’
“요즘 반도체 엔지니어는 연봉이 10만 달러부터 시작한다. 불과 3~4년 전과 비교해 두 배가 됐다. 모든 물가가 올랐다고 보면 된다. 마켓 계산원도 시급으로 20달러를 받는다.”
24일 중앙일보와 통화한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 관계자의 말이다. 일단 곳간이 달라졌다. 테일러시의 올해 세수는 전년 대비해 200% 늘었다. 이달 기준 누적 판매세와 사용세 기준이다. 테일러시 측은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건설로 세금 수입이 늘었으며 앞으로 이런 현상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삼성전자엔 고심이 늘고 있다. 당초 예상한 공사비는 170억 달러(약 22조5000억원)였지만 추가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어서다. 업계에서는 공장 완공 때까지 최소 80억, 최대 100억 달러의 추가 비용이 들 것으로 본다.
글로벌 반도체 지형이 격변하고 있다. 미국과 아시아, 유럽 등이 저마다 자국 내 생산 기지 구축을 추진하면서다. 기존 반도체 지도에서는 한국·대만 등 일부 동아시아 지역에 제조 공장이 집중됐지만, 향후 2~3년 내엔 유럽·미국·중국 등 세계 곳곳에 포진하는 모양새다.
전문가 견해는 엇갈린다.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을 통해 의미 있는 협상 성과를 얻애낸다면 ‘향후 10년 후’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긍정론과 당장 투자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는 현실론이 맞서면서다.
당장 새로 짓는 공장들의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중앙일보가 반도체 전문가와 업계 관계자 11명에게 자문해 평가한 결과 현재 건설 중이거나 건설 예정인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공장 20곳 중 절반의 기상도가 ‘흐림’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현재 상황을 “효율적 분업 구조에서 비효율·블럭화로 바뀌고 있는 것”(김용석 성균관대 교수), “분업의 판이 깨진 것”(조중휘 인천대 명예교수)이라고 평가했다.〈그래픽 참조〉
공장은 늘어나지만 생산성은 물음표
조사 대상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TSMC·인텔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과 일본의 라피더스 연합, 중국의 반도체 기업의 공장이다. 지역은 미국·중국·한국·대만·일본·독일로 한정했다. 공장별로 ▶생산비용과 ▶지정학적·환경 리스크 ▶반도체 장비·설비 반입 ▶향후 수요 확보 ▶보조금·세제 지원 ▶용수·전력 공급 ▶초과수익 공유 등 정부 리스크 ▶노동력 공급 등 9개 항목을 평가한 결과다.
전문가 평가 결과 주요 20곳 중 10곳은 3개 이상 항목에서 “우려스럽다”는 진단이 나왔다. 삼성이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조성 중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도 마찬가지다. 전문가가들은 삼성전자 생산비용과 노동력 부족을 숙제로 꼽았다. 이는 TSMC·인텔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삼성·TSMC 공장의 경우 ‘초과수익 공유 등 해당 정부의 추가 요구사항’ 항목에서 위험도가 높아졌다. 반도체 보조금과 관련한 가드레일 조항이 자국 기업보다 해외 기업에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어서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학교수(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학회장)는 “건설비가 많이 들어도 시장이 있기 때문에 이를 감수하고 현지 공장을 짓는 것”이라며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세액 공제를 최대한 받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보조금을 준다 해도 건설 비용은 훨씬 많이 든다. 초과이익 환수나 기밀 제공 같은 조항까지 더해지면 셈법이 너무 복잡해진다”며 “이번 방미로 정부가 조건을 완화할 수 있다면 기업 부담이 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생산기지의 경우 중장기적으로 생산비용이나 환경 리스크, 정부 규제 등에서 개선될 여지가 많다는 점도 주목된다. 김용석 성균관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중국이 초미세 공정에는 투자를 못 하지만 레거시(구형) 공정 쪽에 대규모 투자를 해온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미국의 제재가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중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회사인 YMTC(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는 최근 자국산 장비를 활용해 3D 낸드플래시를 생산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일본 내 건설되고 있는 공장은 지진 등의 환경적 요인, 수요 측면, 노동력 측면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현재 세계 반도체 생산 기지를 도맡고 있는 대만 역시 지정학적 리스크, 용수 부족, 환경적 요인 항목에서 감점을 받았다.
분업화→블럭화 돼가는 세계, 한국은
SK하이닉스가 운영하는 중국 다롄 공장 등도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5월부터 다롄에 낸드 2공장을 증설하고 있다. 정확한 공사 규모나 완공 시기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투자가 50% 줄어든 만큼 탄력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올 10월에 만료되는 대(對) 중국 규제가 연장되지 않는다면 다롄 공장에 미국·유럽·일본산 반도체 장비 반입이 어려워질 수 있다. 이런 우려에 일부 전문가는 ‘공장 증설 불가’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SK하이닉스는 우시 공장에서 D램을 생산하고 있다. 삼성전자 역시 중국 시안에서 낸드 전체 생산량의 40%를 생산한다. 연원호 대외경제연구원 경제안보팀장은 “만약 미국의 기조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중국 철수는 불가피할 수 있다. 그동안 유예가 무한정 연장되는 경우는 없었고, 언젠가는 종료되는데 3~5년 후로 전망할 수 있다”며 “투자 원금을 회수할 때까지 정부가 미국과 전략적 협상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반도체 지각 변동이 중장기적으로는 ‘K-반도체’에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반도체 밸류 체인은 경제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한 생산구조였지만 각국이 자국 내 생산에 나서며 이 효과가 사라졌다”며 “그 과정에서 반도체 가격이 비싸져 한국 기업에 이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재근 교수는 “삼성전자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시장 공략을 위해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것인데 이는 결국 한국 메모리 시장을 키우는 구조”라며 “10년 후 반도체 전 세계 매출은 80%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는데 누가 그 파이를 가져가느냐가 관건이다. 한국은 메모리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두 분야에서 모두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 자문단 리스트
「 김경훈 한국무역협회 공급망분석팀장
김선우 메리츠증권 연구원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
김용석 성균관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
김정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
연원호 대외경제연구원 경제안보팀장
이우근 칭화대 집적회로학원 종신교수
조중휘 인천대 임베디드시스템공학과 명예교수
황민성 삼성증권 연구원(가나다순)
」
박해리·고석현·김수민 기자 park.hae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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