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정규직' 아닌 '방송지원직' 만들어 그림자 취급"
[변상철 기자]
▲ 방송작가유니온(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조합원이 피켓을 든 모습. |
ⓒ 방송작가유니온 |
"비록 파업 현장에 함께 할 수 없는 프리랜서의 신분이지만, 방송의 한 축을 담당하는 주체로서 MBC 시사교양 작가들은 언론노조의 파업을 지지합니다." - 2008년 12월 30일 MBC 구성작가 성명
"PD들이 돌아왔을 때 업무복귀가 보장되지 않는 프리랜서임에도 라디오를 아끼는 마음으로 MBC 라디오 모든 프로그램의 작가들은 파업을 지지한다." - 2017년 9월 4일 MBC 라디오 작가들의 파업 지지 성명
문화방송은 공영방송으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1988년, 1992년, 1999년, 2008년, 2012년 등 수차례의 파업을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푸른 수의의 손석희를, 백지연 앵커를 알게 되었고, 광우병 사태를 거치며 최승호 PD를 알게 되었고, 이용마 기자를 응원했다. 박성제 전 MBC 사장이 2008년 전국언론노동조합 총파업 당시 MBC본부장을 맡으며 징계를 받을 때도 함께 응원했다. 이처럼 MBC의 파업이 있을 때마다 그 길에 항상 작가들의 지지와 연대가 있었다.
그런데 성명서마다 눈에 밟히는 문구가 있다. '비록 파업 현장에 함께 할 수 없는 프리랜서이지만...' 방송 제작에 있어 작가는 분명 감독, 스태프 등과 마찬가지로 중요 구성원이다. 작가 없는 방송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비정규직'이다.
그동안 방송작가들은 노동자가 아닌 프리랜서로 불렸다. 물론 예능이나 다큐 등 프리랜서 신분이 더 적절한 분야도 있다. 그러나 보도국 내의 대다수 시사 프로그램의 작가들은 같이 일하는 기자·앵커와 마찬가지로 매일 출근하고 함께 회의하며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하지만 이들에겐 휴게시간, 유급 연차휴가, 퇴직금 등 노동법에 규정된 권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프리랜서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해고 통보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계약해지는 '일상다반사'다. 그래서 이들은 프로그램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보따리장수'와도 같다.
이들의 계약서에는 '프로그램 업무'라는 두루뭉수리한 내용만 담겨 있을 뿐 업무 강도나 경력 등에 대한 것은 없다. 시사프로 작가들은 프로그램의 대본 작성은 물론, 프로그램 패널 선정, 섭외까지 해야 했다. 작가들은 방송이 끝난 뒤에도 아이템을 찾고, 섭외를 하고, 수시로 회사의 컨펌을 받았다.
이후 작가들은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정해달라는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고용노동부는 2021년 4월부터 지상파 3사(KBS, MBC, SBS)의 보도, 시사교양 부문 방송작가를 대상으로 근로감독을 벌인 결과 363명 중 152명의 근로자성이 인정된다고 같은 해 12월 30일 발표했다. 즉 민법상의 프리랜서라기보다는 노동법 상 노동자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노동자 지위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3월 'MBC차별없는 노동조합'을 만든 김은진 위원장은 당시 MBC측이 이와 관련된 내용을 사전에 알고도 공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MBC 측은 2021년 11월 30일 낮시간대 방송되는 <뉴스외전> 작가 3명에게 재계약 불가를 통보했는데, 김 위원장은 그 중 한 명이다.
▲ 권리찾기유니온, 방송작가유니온 등이 2021년 12월22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지청 앞에서 '가짜 3.3 방송노동자 근로자지위확인 공동진정 특별접수' 기자회견을 열었다. |
ⓒ 오마이뉴스 |
고용노동부는 근로자성이 인정된 방송작가와 근로계약을 체결하라는 내용의 시정지시서를 각 방송사에 전달하며 2022년 1월 18일까지 이행하라고 했으나 이미 작가들은 계약해지를 통한 해고통지를 받은 상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들이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않았으면 해고되는 일은 없었지도 모른다. <뉴스외전>에서 일하다 해고된 작가 3명 중 2명은 법정투쟁을 시작했다. 그 결과 김 위원장은 승소해 복직했고 나머지 한 명은 아직도 소송 중이다.
하지만 작가가 회사로 돌아간 후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지난해 10월 이수진 의원이 낸 국감 보도자료에 따르면, MBC와 KBS는 작가들을 '방송지원직'이란 새로운 직군으로 분류한 뒤 모든 분야에서 차별 대우를 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작가를 '지원직'이란 직분으로 강등해 굴욕을 주고 있는 것이다. KBS는 행정 업무에 작가를 배치하기도 했다. 경력 22년 차인 김은진 위원장은 당초 하던 대로 대담을 맡기로 약속받고 <뉴스외전>에 복귀했으나, 얼마 뒤 자료조사를 시켜 항의하기도 했다.
MBC에는 <뉴스외전>에 1명, 아침뉴스 <뉴스투데이>에 5명 등 총 6명의 '방송지원직' 작가가 있다. 나머지 수많은 작가들은 해고 사유도 모른 채 잘려 나갔다. 아침뉴스 작가들은 프리랜서일 때와 달라진 바 없거나 더 열악해졌다고 주장한다. 새벽 2시 30에 출근해 오전 11시 30까지 주 5일 일하는 새벽 근무도 여전하고, 휴가도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
고용노동부로부터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뒤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MBC 작가 6명은 이러한 차별을 개선해보고자 'MBC차별없는 노동조합'을 세웠다. 지난 19일 만난 김 위원장은 비록 지금은 6명에 불과한 노조원이지만 MBC 내의 갈 곳 없는 차별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열려 있는 노조라고 했다. 특히 '작가 노조'가 아닌 'MBC차별없는 노조'라고 이름을 지은 건 방송국 내에 존재하는 비정규직, 외주 연출이나 조연출, 심지어 운전노동자까지 도움과 연대가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노조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복직은 되었지만 차별은 더 체감됐어요. '방송작가 정규직'이 아니라 '방송지원직'이라는 직군을 만들어서 그야말로 그림자 취급하는 거죠. 작가는 방송을 구성하는 한 구성원인데 자료조사나 허드렛일 하는 사람들 마냥 방송지원직이라는 이름을 주고는 온갖 차별을 정당화 하고 있어요. (<뉴스투데이>에선) 새벽부터 일하는 작가들에게 법인카드를 줬다가 (금액을) 20만 원에서 10만 원으로 줄이더니 그마저도 빼앗아가 버리고, 대체인력이 없어 휴가도 제대로 쓰지도 못해요. 무엇보다 20년 이상 경력작가를 방송지원직으로 제한해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주지 않습니다. 프리랜서로 일할 때는 경력작가라고 가장 힘든 일을 시켰으면서 방송지원직 신분이 되자 주요 업무에서 배제되고 있습니다. 복귀 초 대담 출연자가 준비해야 할 각종 자료조사를 저에게 배당했을 때는 심한 굴욕감과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취재 작가나, 1~2년 차들이 하는 업무이기 때문입니다."(김은진 위원장)
김 위원장이 처음부터 작가들의 노동성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한 건 아니다. 보도국 외의 다른 프로그램을 할 때는 여러 개 프로그램을 겸업하면서 프리랜서답게 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뉴스외전>에선 겸업 자체가 불가능했다. 주5일 상근에 하루종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일은 더 하고 돈은 덜 받고, 직원이 아니면 얼마나 막대해질 수 있는지 실감했기에 작가의 노동자성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위원장은 해고 전인 2021년 프리랜서 신분으로 <뉴스외전>에서 일할 때 일주일에 3번은 새로운 인물, 2번은 경제 전문가 출연 고정을 맡았다. 섭외부터 대본, 자막, 의전, 방송 밑그림, 생방송 진행, 정산 등 작가 홀로 업무를 담당해야 했다. 이슈되는 새로운 인물을 서브 작가도 없이 혼자서 주 3회씩 찾아내고 섭외하고 대본 쓰는 건 시사 대담 좀 해본 작가들은 얼마나 무리인지 잘 안다. 수차례 과중한 업무라고 시정을 요구했지만 회사는 그럴 때마다 못 하면 나가라는 식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작가는 <뉴스외전>에서 근무하던 1년 11개월 동안 점심시간을 보장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점심 식사를 서너번이나 했을까요. 그나마도 출연자가 오면 먹던 걸 놔두고 가곤 했어요. 출연자 의전은 다른 사람이 담당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작가들에게는 섭외, 대본, 의전 등등 모든 일을 다 하라고 했죠. 비슷한 다른 코너를 하는 기자들은 일주일에 2~3번 대본을 쓰고, 정치 대담같은 경우는 의전을 도와주는 정치 지원 역할도 있었어요. 일 년 넘게 점심 밥을 못 먹고 일하는 건, 작가 경력 17년 동안 처음이긴 했어요. 여러 번 말했는데도 어쩔 수 없다고만 하더라고요."
김은진 위원장은 20년이 넘게 방송작가로 일해왔지만 MBC <뉴스외전>에서 일할 때만큼 과중한 노동과 인격이 말살된 적은 없었다고 했다. 심지어 MBC에서 여러 차례 일 해왔지만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한 번도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인격적으로 하대 받지 않아서 충격이 더 컸다고 한다. 사람 취급 당하지 못하는 상황을 타개하고 싶어서 하루는 유언을 녹음해 놓기도 했다고 한다.
▲ 지난 19일 법무법인 원곡에서 파이팅챈스와 MBC차별없는 노동조합이 탄압과 피해에 대한 법률지원 협약을 맺었다. |
ⓒ 변상철 |
고용노동부의 방송작가 근로감독 이후 방송국이 작가를 대하는 방식은 달라졌을까? 무늬만 정규직인 '방송지원직'을 만들어 대놓고 차별하고, 정규직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프리랜서 작가들은 개편 때마다 여전히 해고 위험에 놓여있다.
'불의가 정의를 심판하고, 탐욕이 양심을 해고'하던 MBC의 정상화를 위해 정의를 외쳤던 기자들은 지금 본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가들의 처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방송은 기자나 연출의 힘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방송국의 공정한 운영은 방송국의 구성원 모두에게 동일해야 한다. 방송의 한 축으로, 공영방송의 한 구성원으로, 방송의 공정성을 위해 함께 싸웠던 작가들이 처한 차별 앞에 MBC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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