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역' 결심하고 제발로 구치소로 간 그를 생각한다

희음 2023. 4. 24.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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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범죄 집단을 법정에!④] 함께 살기 위해 돌봄 기본권과 '보편적 돌봄 소득' 말하기

이상현 활동가와 녹색당 활동가들은 2021년 10월 포스코 국제회의장에서 포스코를 비롯한 산업계 온실가스 감축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150만원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상현 활동가는 포스코의 기후위기 책임을 고발한 직접행동에 대한 유죄 판결에 불복하여 벌금 납부를 거부하고 4월 18일~5월 2일 15일동안 노역을 수행합니다. 이에 기후재판 시민불복종에 연대하는 사람들이 기후정의와 시민불복종·직접행동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이상현 활동가의 노역 기간동안 매일 연재합니다. <기자말>

[희음 기자]

 ‘414 기후정의파업, 함께 살기 위해 멈춰’ 집회에 참석한 환경단체 회원들과 시민들이 14일 오후 세종 정부세종청사 환경부를 향해 행진 도중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죽는다’는 의미로 ‘다이인(Die-in) 액션’을 진행하고 있다.
ⓒ 유성호
 
독일의 페미니스트 시인 케테 콜비츠의 유명한 두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다.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계는 터져버릴 것이다."

기후생태위기 시대의 진실 역시 여기에 기대어 말할 수 있다. 기업들이 앞 다투어 그린워싱을 해대는 이 시대에 진실을 말하는 이는 누구인지를. 또 그 진실에 의해 터져버릴 것을 겁내는 쪽은 어디인지를. 답은 어렵지 않다.

누구든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다. 기후활동가들, 기후부정의에 맞서 싸우는 이들이 진실을 말하는 쪽이라는 것을. 포스코가 주최한 수소환원제철포럼에서 단상에 올라 포스코의 은밀한 생태학살을 비판한 이들 또한 진실을 말하는 쪽이었다.

물론 진실 말하기는 1분 만에 가로막혔다. 그런데도 포스코는 고작 1분 동안 누설되었을 뿐인 이 진실의 증언 행위를 주거 침입과 업무 방해라는 명목으로 고발하고 기소했다. 어쩌면 이것은 이 1분의 진실이 포스코에 있어 그만큼 위협적인 것이었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누설된 진실로 인해, 착취와 생태학살, 끝 모르는 이윤 증식의 욕망으로 점철된 자신들의 세상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그들을 떨게 했을지 모른다.

최초 선고된 벌금은 녹색당 활동가들이 청구한 정식 재판에서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받아 그 액수가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유죄라는 꼬리표는 떨어지지 않았다. 터져버릴지도 모르는 자신의 세상을 지켜내려는 기업의 의지에 장단을 맞추듯, 진실을 말한 이에게 유죄라는 이름을 붙이는 사회.

하지만 진짜 유죄는 포스코라는 기업과 이 사회가 아닐까. 벌금형을 거부하며 노역을 선택한 이상현 활동가 역시 누가 유죄인지를 온몸으로 물으려 했을 것이다. 포스코라는 기업이 자신의 배를 부풀리기 위해 채굴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한 존재, 한 생명, 한 인간 동물의 피와 살이라는 것을 노역을 통해 증언하려 했을 것이다. 

노역을 결심하고 제 발로 구치소로 걸어 들어간 이상현 활동가의 몸을 생각한다. 뜯어 먹히기를 자처하는 몸. 입술로 말하는 것을 넘어 행위로 말하는 몸. 기후생태위기를 가속화하고 생태학살을 자행하는 기업과 자본, 그들과 한통속인 것처럼 보이는 대한민국 정부 앞에서, 연약해 보이지만 신체의 온 구석구석을 성대로 만들어 힘껏 외치고 울고 치를 떠는 몸. 그 몸이 어떤 몸인지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 몸이 하는 일을 말하고 싶다. 그 몸은 세상을 지키고 돌보는 몸이다. 지구라는 공동의 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기후재난으로 죽임당하지 않기를,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몸 안에 빼곡하다. 포스코의 행사장에서 했던 저항행동 역시 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상현 활동가의 몸과 다르지 않은 몸을 가진 이들이 내 주위에 꽤 있다. 기후활동가뿐 아니라 노동운동과 장애해방운동 동물해방운동을 하는 이들, 여성과 청소년, 홈리스, 이주민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이들. 이것은 세상을 돌보는 이들의 목록이다.

이들은 자신과 제 가족을 넘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얼굴들을 기꺼이 상상한다. 그 모든 삶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들은 싸운다. 대가나 보상 없이도, 임금을 받지 않고도 이들은 아낌없이 목소리를 내고 몸을 쓴다. 다시 말하지만 돌보기 위해서다. 

각자도생의 논리와 가족주의, 개인의 책임과 능력이 강조되는 이 시대에 이들이 행하는 너른 돌봄은 아이러니에 가깝다. 하지만 역으로 볼 수도 있다. 이들은 지금의 사회에 묻고 있는 게 아닐까. 돌봄의 상상력을 다르게 작동시켜야 하지 않느냐고. 혈연을 넘고 교환관계를 넘고 자격을 넘어, 젠더를 넘고 나이를 넘고 국적을 넘고 종을 넘어 누구나 이 대지 위에서 함께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 아니냐고. 기후위기를 포함한 지금의 위기는 이들의 얼굴을 줄 세우면서 누구를 더 많이 착취할지, 어떤 존재를 죽음으로 내몰거나 죽도록 내버려둘지, 또 어떤 삶을 배제하고 삭제할지를 구분한 데 따른 당연한 결과인 게 아니냐고. 
                     
내게 들려온 활동가들의 이 같은 몸의 목소리 앞에서 나는 돌봄에 대한 기본권을 거듭 강조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특히 더케어컬렉티브가 제안한 "난잡한 돌봄의 윤리" 개념을 참조해 말하고 싶다. 더 케어컬렉티브는 <돌봄선언>에서 보편적 돌봄이란 "직접적인 대인 돌봄뿐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구 자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종류의 돌봄에 대해 모두가 공동의 책임을 지는 사회적 이상"이라 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윤리를 "난잡한 돌봄"으로 지칭한 바 있다. 이것은 인간만을 관계 맺기와 상호 의존의 대상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 동물, 자연생태계까지를 포괄하는 돌봄이다. 모든 생명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형태의 돌봄이다. 돌보는 자와 돌봄받는 자가 뒤엉키거나 수시로 자리를 바꾸는 일이다.

상상해본다. 스스로를 돌보고 서로를 돌보고 세상을 돌보는 일이 모두의 일이 될 때, 그리고 이 일이 우리 대부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될 때에도 생태학살을 자행하고 기후생태위기를 가속화하는 자본주의적 생산 시스템이 여전히 지금처럼 공고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우리 사회에 서로를 돌보기 위한 공공의 기반이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보편적 돌봄 소득"과 같은 형태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돌봄 기본권은 세상을 돌보는 활동가들이 짊어진 짐을 더 많은 이들이 나누어 질 수 있게 하는 핵심적인 마중물이 되어주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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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멸종반란과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에서 활동하는 희음 활동가가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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