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의 탈을 쓴 사자왕, 대구로 돌아오는 날
[이준목 기자]
▲ 승리 거둔 이승엽 감독 7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와 KIA 타이거즈의 경기. 두산 이승엽 감독이 4-1 승리를 거두고 더그아웃에서 코치진과 자축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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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킹'이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익숙한 푸른 유니폼 대신 곰의 탈을 쓴 낯선 모습이다. 이승엽 두산 베어스 감독은 4월 25일부터 27일까지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열리는 삼성의 원정 3연전을 위하여 '적장'으로 대구를 찾게 됐다.
야구팬들에게 이승엽과 삼성은 절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다. KBO리그 선수 시절 삼성에서만 467개의 홈런을 날렸고, 은퇴 후 그의 등번호 '36'은 구단 영구결번으로 남았다.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한국야구의 홈런 역사를 갈아치우던 '국민 타자 이승엽'의 모습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명장면이다. 이승엽의 또다른 대표적인 별명인 '라이언 킹'은 그가 삼성을 빛낸 수많은 슈퍼스타 중에서도 얼마나 상징성이 큰 레전드였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이승엽 감독이 지난해 두산 사령탑에 올랐다는 소식은 삼성 팬들에게는 큰 충격을 줬다. 이승엽 감독은 만일 지도자로 활약하게 된다면 친정인 삼성의 부름을 원한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은퇴한 지 5년이 넘도록 이승엽은 줄곧 장외에서만 활동했을 뿐 프로에서 어떤 코치 경력도 쌓지 않았다.
그래서 두산행 소식을 알려지자 이승엽에게 서운함을 드러내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한편으로 팀의 최고 레전드를 다른 팀에서 데려가도록 내버려둔 삼성 구단 측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삼성은 이승엽과 동갑내기이며 구단의 또다른 레전드였던 박진만 감독을 대신 선임하며 팬심을 달랬다.
여론의 반응을 알고 있던 이승엽 감독은 두산 사령탑에 오른 직후 삼성 팬들에게 전하는 인사를 남겼다. 이 감독은 "삼성에서 받은 큰 사랑은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삼성 팬들께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보답하고 싶다"고 친정팀들과 팬들을 향한 예의를 지켰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두산의 감독으로서 팀의 승리를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프로다운 책임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승엽 감독이 삼성이 아닌 다른 팀에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게 된 것은, 어쩌면 서로를 위하는 측면도 있다. 해태 왕조의 레전드로 꼽히는 선동열 감독은 라이벌인 삼성에서 감독직을 시작했다. 이종범 LG 코치나 이강철 KT 코치도 친정팀 KIA가 아닌 다른 팀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삼성의 원조 레전드인 이만수는 SK(현 SSG) 감독으로 대구를 찾았고, 삼성에서 선수-코치-감독을 모두 거친 대표적인 원클럽맨인 류중일 감독도 역시 LG 사령탑을 역임한 바 있다.
이외에도 친정팀이 아닌 다른 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간 인물들은 수두룩하다. 선수시절 레전드였다고 해서 꼭 지도자 경력도 친정에서만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팀 레전드가 감독이 된다는 것은 사실 본인에게나 구단에게나 부담스러운 측면도 있다. 슈퍼스타 출신들도 감독으로서는 실패한 사례가 적지 않다. 선동열 감독은 친정팀 KIA의 지휘봉을 잡았지만 지도자로서는 선수시절만큼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고 초라하게 물러나야 했다. 물론 삼성의 최전성기를 이끈 류중일 감독의 사례도 있지만 이미 부임 당시 우승권 전력을 물려받는 행운이 따른 측면도 있었다. 성과가 좋으면 다행이지만 자칫 실패하면 선수 시절의 명성과 추억마저 흠집을 남길 수 있다.
더구나 이승엽 감독은 은퇴 이후 별다른 지도자 경력이 없는 상태였다. 이 감독의 너무나 거대한 선수시절 커리어 때문에 만일 삼성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면, 언제든 유력한 차기 감독 후보군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높아 자칫 현직 감독의 위상을 흔들 수도 있는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코치 경력없이 감독으로 직행하게 된 '초보' 이승엽 감독은, 두산에서는 레전드 프리미엄 없이 오직 지도자로서의 객관적 능력만으로 자신을 증명해내야 하는 상황이 더 홀가분할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이승엽 감독이 이끄는 두산과, 친정팀 삼성은 2023시즌 개막 이후 현재 대조적인 위치에 놓여있다. 지난해 9위에 그치며 가을야구에 진출에 실패했던 두산은 올시즌 초반이기는 하지만 11승 1무 7패로 6할(.611)이 넘는 승률을 거두며 순항하고 있다. 반면 박진만 감독이 이끄는 삼성은 7승 12패(.368)로 꼴찌 한화에 불과 반게임 차에 앞선 9위에 그치며 고전하고 있다.
이승엽 감독은 초보 사령탑의 경험 부족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선방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 감독의 리더십은 한 경기에 일비일희하지 않고 시즌을 길게 보고 운용하는 관리야구, 실수를 탓하기보다 적극성과 자신감을 강조하는 믿음의 야구에 가깝다.
물론 19일 한화전(6-7패), 21일 KT전(6-10) 작전야구와 투수교체 타이밍에서는 아직 미숙한 모습을 드러내며 내준 경기들도 있지만, 팀 홈런 2위(15개)로 선이 굵은 호쾌한 야구에 대한 호평도 적지 않다. 특히 두산은 시즌 개막 이후 3점 차 이내 접전만 벌써 10경기나 치렀고 6승 4패로 선방하며 성적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있다.
두산은 201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삼성에 강한 면모를 보였으나 지난 2022 시즌에는 5승 11패로 크게 밀리며 8년 만에 열세를 기록했다. 두산에게는 올시즌 삼성과의 첫 맞대결이 자존심 회복의 의미도 있는 데다, 1게임 차에 불과한 선두 SSG와의 격차를 좁혀 본격적인 상위권 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분수령이다.
한편 삼성 팬들 입장에서 이제는 적장이 되었지만 이승엽의 귀환을 바라보는 시선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평일 경기임에도 만원관중이 기대될 만큼 이번 대구 3연전에서 치열한 예매전쟁이 펼쳐진 것은 역시 '이승엽 효과'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우측 외야 담장엔 구장의 명물이 된 '이승엽 벽화'가 남아있다. 삼성 구단은 이승엽이 두산 사령탑으로 선임된 이후에도, 이승엽을 기리는 역사를 지우지 않고 유지하기로 결정하며 구단 역사상 최고 레전드에 대한 예우를 지켰다.
삼성 측은 "상대팀 감독이라도 이승엽은 변함없는 삼성의 역사이자 유산이기 때문" 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아마 삼성 팬들이 이승엽을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경기에서는 삼성의 승리를 응원하겠지만, 이승엽이 삼성의 전설이라는 사실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이승엽 감독도 대구 원정을 앞두고 "아무래도 선수 시절을 보낸 삼성과 대구에서 경기할 때는 특별한 감정을 느낄 것 같다"며 남다른 감회를 숨기지 못했다.
야구팬들은 이승엽과 삼성의 첫 재회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이뤄질지 주목하고 있다. 이 감독은 선수들보다 자신이 주목받는 것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대구 관중들에게 인사를 전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또한 삼성의 전성기를 이끈 레전드인 박진만 감독과 선의의 지략대결도 관심을 모은다. '이승엽 더비'로 인하여 두산과 삼성의 맞대결이 2023시즌 프로야구 흥행을 이끄는 '빅매치'로 부상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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