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복순' 두 번의 웃음과 두 번의 눈물이 지닌 의미

고광일 2023. 4. 2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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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길복순>

[고광일 기자]

▲ 영화 <길복순> 스틸컷 영화 <길복순> 스틸컷
ⓒ 영화 <길복순> 스틸컷
 
*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확실히 짚고 넘어갈 게 있다. 기업처럼 움직이는 프로페셔널한 킬러들의 세계가 배경으로 쓰이지만 <길복순>은 <존 윅>이 아니다. 배신자들에게 복수하는 킬러의 여정이 그려지지만, <길복순>은 <킬빌>이 아니다. 감독 역시 인터뷰를 통해 <존 윅>과 <킬빌>을 참고했다고 말했고, 최고 수준의 액션을 기대했다면 어쩔 수 없이 실망할 부분이 없다고까지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노선의 영화를 같은 잣대로 비교하는 건 온당치 않다.

<킹 메이커>에서 정치를 테마로 정치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김운범의 이상과 마타오어의 귀재 엄창록의 현실 인식을 두고 갈등을 그렸던 변성현 감독은 <길복순>에서도 두 번의 웃음과 두 번의 눈물을 통해 현실의 문제들을 투영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먹고 사느라 가족 사이에서 천덕꾸러기이자 투박하고 외로운 조폭으로 등장했던 송강호의 열연을 볼 수 있는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와 결이 같다.
 
▲ 영화 <길복순> 스틸컷 영화 <길복순> 스틸컷
ⓒ 영화 <길복순> 스틸컷
 
두 번의 웃음과 두 번의 눈물
 

복순이 사교적 웃음을 거두고 진심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장면은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차민희의 꼼수에 휘말려 킬러들의 표적이 됐을 때다. 축하할 일이 있거나 위로해야 할 상황이 오면 은퇴한 선배의 식당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던 동료들이 돌변해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비극적인 순간. 창밖으로 쏟아지는 화사한 햇살을 받고 잔뜩 웃음을 머금은 표정의 복순이 슬로우 모션까지 걸린 채 오래 동안 카메라에 담긴다.

두 번째는 과거로 돌아간다. 가정폭력을 일삼던 복순의 아버지를 죽이러 온 차민규와의 첫 만남의 순간이다. 천장에 목이 매인 채 깨금발을 하고 겨우 버티던 의자를 발로 차버리고 손수 아버지를 죽인 복순은 세상에 없던 밝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뒤돌아서 차민규를 바라본다. 첫 번째 상황과 마찬가지로 창밖으로는 화사한 햇살이 쏟아지고 슬로우 모션이 걸린 복순의 웃음이 카메라에 오래 담긴다.

복순이 오열하는 장면도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재영이 가방에서 가짜여권과 총을 본 적이 있다며 복순에게 국정원 아니냐고 묻자 진짜 정체를 얼버무린 뒤 화장실에 들어가 물을 틀어놨을 때. 다음은 차민규가 자신을 살해하는 과정을 재영이 볼 수 있게 해놨다고 하자 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자동차 안에서. 정을 나누던 동료들이 배신해도, 친부를 살해해도 해맑게 웃던 복순이지만 딸과 얽히는 장면에서만큼은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다.
 
▲ 영화 <길복순> 스틸컷 영화 <길복순> 스틸컷
ⓒ 영화 <길복순> 스틸컷
 
이런 강렬한 대비는 "사람 죽이는 건 심플해. 애 키우는 거에 비하면"이라는 복순의 진심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동시에 워킹맘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장치다. 이벤트 '회사'에 다니며 동시에 싱글'맘'인 복순의 상황이 많은 워킹맘의 현실과 다르지 않은 탓이다. 청부살인은 웃으며 아버지를 죽일 수 있던 복순의 타고난 재능이 발현되는 업무이자 업계 넘버원이라는 사회적 인정, 매 순간 느끼는 성취감이 자존감의 향상으로 선순환된다.
육아는 다르다. 목적과 마감이 확실한 청부살인과 달리 육아는 끝이 없다. 데드라인이 보이지 않는 반복 업무 속에서 성취감을 느끼기는 당연히 어렵고 사회가 그 노력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입시정보가 빠삭한 다른 부모들보다 부족하다는 열패감, 싱글맘으로 재연을 돌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다는 죄책감에 휩싸인 상태. 사춘기의 재연은 복순의 장기인 수싸움도 통하지 않는 버거운 상대. 눈물이 터져 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육아와 교육을 거의 전담하는 대부분 워킹맘이 그렇듯 말이다.
 
▲ 영화 <길복순> 스틸컷 영화 <길복순> 스틸컷
ⓒ 영화 <길복순> 스틸컷
 
사랑의 본질을 향한 집요한 연구

<길복순>은 누아르의 배경에서 나이 든 조폭 두목과 젊은 언더커버 사이의 브로맨스를 그렸던 변성현 감독의 영화다. 화면이 얼마나 피칠갑이 되든 <길복순>은 결국 로맨스 영화로 수렴한다.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다층다각적으로 사랑을 해석해 온 배우 전도연이 캐스팅된 것도 필연적 이유일 것이다. 집요한 사랑의 연구자 변성현과 전도연의 이번 탐구 대상은 민규와 재연이다.

재연과 민규는 공통점이 있다. 예측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두 사람에게는 복순의 장기인 약점을 파악하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시뮬레이션을 여러 차례 거듭하며 수싸움을 해도 복순은 승리를 위한 착점을 할 수 없다. 대결 양상으로 표현됐지만 어쩌면 이 예측 불가능성이 사랑의 본질인지 모르겠다. 가장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 제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순이 예측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사랑이 완성된다. 수없는 시뮬레이션에도 없던 깨진 유리잔의 파편이 민규를 복순과 첫 만남의 순간으로 돌려놓고 복순은 최후의 일격을 가할 기회를 얻는다. 민규와의 대결이 끝난 후. CCTV를 통해 킬러로 살아온 자신에게 재연이 실망했으리라 믿고 복순은 급히 집으로 향한다. 재연은 복순에게 오히려 '수고했어'라 말하며 굳게 닫혀있던 방문을 연다.

복순은 셀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을 지나서야 깨닫는다. '미리 헤아려 짐작함'이란 예측이 사랑 앞에서 오만이라는 걸. 그리고 넷플릭스의 구독자도 알게 된다. 이 글을 읽는 5분 동안 10명을 더 죽이는 <존 윅>도 아니고, 스타일리쉬한 피바다를 위해 취향의 백과사전을 펼쳐놓은 <킬 빌>과 <길복순>은 다른 영화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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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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