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제 소원을 이뤄주세요"…尹 대통령에 보낸 국군포로의 편지

장희준 2023. 4. 2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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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 김성태 할아버지, 尹대통령에 서한
"죽거든 서울현충원 땅 묻히길" 간절한 호소
박선영 "한맺힌 소원…현충일 추념식 모시길"

"이 노인네 마지막 소원은… 서울현충원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아흔을 넘긴 국군포로 김성태 할아버지(91)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자필로 편지를 썼다. 그는 6·25전쟁 당시 북한군에 붙잡혀 50년 넘는 포로생활 끝에 돌아온 참전용사로, 현재 김정은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탈북 국군포로 김성태 할아버지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쓴 자필편지. 김 할아버지는 "죽어서 서울현충원 땅에 묻히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간절히 호소했다. [사진제공=사단법인 물망초]

24일 아시아경제가 입수한 서한에 따르면 김 할아버지는 윤 대통령을 향해 "올해 92세로, 얼마 남지 않은 목숨입니다"라며 "이 논내(노인네) 맞으막(마지막) 소원은 내가 죽어서 영광스러운 국립현충원 동작동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파묘(이장 등으로 인한 공묘)도 좋습니다.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라고 거듭 부탁했다.

편지는 국군포로 등을 위한 연구·활동을 전개해온 사단법인 물망초를 통해 금명간 윤 대통령에게 발송될 예정이다. 거동이 어려울 정도로 노쇠한 김 할아버지는 어렵사리 펜을 쥐고 한 글자 한 글자를 적었다고 한다. 55년 전 부여받은 군번 '1105214'까지 꾹꾹 눌러 적은 뒤엔 지문 대신 포로 시절 흉터로 채워진 지장을 찍었다.

국립묘지는 국가보훈처의 소관이지만, 서울현충원은 예외적으로 국방부 산하에서 관리된다. 현충원에 안장되려면 '유공'을 인정받아야 하는데, 현행법상 국군포로는 유공자가 아닌 참전용사로 분류된다. 따라서 현충원에 잠든 국군포로의 수도 따로 집계되지 않고 있다. 다만 김 할아버지의 경우 '20년 이상 군 복무' 등으로 유공 요건을 충족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 관계자는 "서울현충원이 만장이라고 하지만, 전례들을 보면 얼마든지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며 "얼마 남지 않은 국군포로 생존자께서 '파묘 자리'라도 바란다고 호소하실 정도라면 방법을 찾아 모시는 게 국가로서의 예의다. 국군포로들이 탈출할 동안 국방부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을 반성한다면 은혜를 갚을 길을 찾길 바란다"고 말했다.

'국군포로 소원' 서울현충원…"만장" 거부 가능성

1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법원삼거리 앞에서 진행된 ‘31개월만에 열리는 탈북 국군포로 5인의 북한 상대 손해배상 2차 소송 첫 재판 관련 기자회견’에서 원고 김성태 할아버지가 발언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김성태 할아버지가 간절히 원하는 서울현충원은 10여년 전부터 묘역이 '만장'됐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다. 그러나 국방부는 과거 여러 차례 '예외'를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각각 작고했을 당시 서울현충원 내 국가원수 묘역에는 빈자리가 없어 대전현충원으로 가야 했지만, 산을 깎아 두 사람 몫의 자리를 마련했다.

2013년 별세한 '월남전 영웅' 채명신 장군도 '전우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서울현충원 내 사병 묘역에 안장됐다. 가득 찬 묘역 앞줄 빈 공간에 채 장군의 묘소를 별도로 만든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 해당하는 2020년 6월 서울현충원에 묻힌 황규만 전 육군정보처장도 마찬가지다. 한 묘역을 둘이 나눠 쓰는 방식으로, 무명의 전우 곁에 잠들었다.

더구나 서울현충원 묘역 내엔 유족들이 가족묘 등의 이유로 유해를 이장해서 생긴 공묘(빈 묘역)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행상 '한 번 파묘한 자리에는 묘를 다시 쓸 수 없다'는 취지로 안내되지만, 현행법상 재안장을 금하는 조항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현충원 측도 본지 질의에 "공묘에 재안장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은 따로 없다"고 밝혔다.

박선영 물망초 이사장은 "정부가 국군포로 어르신의 한 맺힌 소원에 귀 기울여주길 간절히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역대 대통령 가운데 국군포로 분들을 모시고 '죄송하다, 감사하다, 당신의 헌신을 기억하겠다'고 말한 대통령은 아무도 없었다"며 "다가오는 현충일에 대통령이 국군포로를 초대한다면 뜻깊은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5월 헌정 사상 처음으로 김 할아버지를 비롯한 '탈북 국군포로' 3명을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한 바 있다. 지난달 24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진행된 제8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는 천안함 폭침을 비롯한 서해수호 유가족과 참전 장병들을 모시고 "나라를 지킨 영웅을 제대로 예우하고 따뜻하게 모시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라고 밝혔다.

백발로 돌아온 소년, 어머니 대신 반겨준 '땅'

북으로 끌려가는 국군포로. [이미지출처=책 그들이 본 한국전쟁1]

1932년 9월 경기 포천군에서 태어난 김성태 할아버지는 소작농인 부모의 부담을 덜기 위해 나이를 속여 군에 입대했다. 1948년 고작 열일곱 살 때였다. 7사단 1연대에 배치된 지 2년 만인 1950년 6·25전쟁이 벌어졌고, 개전 닷새째 고립된 전방에서 다친 중대장을 업고 달리던 소년병은 북한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50년 동안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이 시작됐다.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던 소년은 휴전협정을 목전에 둔 1953년 7월 바다로 탈출을 시도하다 다시 붙잡혀 교화소에 수감됐다. '조국반역'이라는 죄목으로, 13년 동안 복역했다. 출소 뒤엔 고향 대신 군마 훈련소 등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1966년 7월 어느덧 서른다섯 청년이 됐을 즈음에는 함경북도 온성의 추원탄광으로 끌려갔다.

어두컴컴한 땅속에서 석탄가루를 삼키며 일흔이 됐을 무렵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다. 2000년 6월의 일이었다. 기적을 바랐지만, 대통령은 '국군포로 생존자를 돌려보내라'는 말 한마디 없이 돌아갔다. 김 할아버지는 이때부터 목숨을 건 탈출 시도를 거듭했고, 마침내 2001년 6월 백발이 된 소년은 북한에 억류된 지 5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편 유엔군 발표자료에 따르면 1953년 7월 정전협정 이후 돌아오지 못한 한국군은 8만3000여명, 이 가운데 8321명만 송환됐다. 과거 국방부는 포로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전몰 처리했지만, 1994년 고(故) 조창호 소위가 최초 귀환하면서 국면이 달라졌다. 2010년까지 80명의 국군포로가 돌아오기까지 정부가 나서 국군포로를 구출한 사례는 없다.

김 할아버지를 비롯한 국군포로 5명은 2020년 9월 김정은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또 다른 국군포로 2명이 김정은을 상대로 한 손배 소송에서 승소한 직후였다. 그러나 공시송달과 재판부 교체 등으로 재판이 지연됐고, 지난 17일 31개월 만에 첫 변론기일이 열렸다. 그 사이 3명이 세상을 떠났고, 국군포로 생존자는 13명으로 줄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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