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점 맞은 학생 많을 때, 교사인 저는 당황스럽습니다
[서부원 기자]
▲ 교실 속 책상. |
ⓒ pexels |
"우리 아이가 시험 문제가 어렵다고 힘들어합니다. 노력한 만큼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소연합니다. 조금 쉽게 출제해주시면 안 되나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치른 뒤 학부모와 상담할 때마다 나오는 주문이다. 특히 내가 가르치는 한국사의 경우, 수능 모의고사 한국사 영역의 출제 문항에 견줘 터무니없이 어렵다는 것이다. 모의고사에선 1등급인데, 교내 시험에서는 3등급도 어렵다고 푸념한다.
솔직히 아이와 학부모의 처지에선 충분히 할 법한 문제 제기다. 그러나 쉽지 않다는 걸 그들도 잘 알 것이다. 마치 자동응답기처럼 '고려하겠다'는 답변을 내놓지만, 다음 시험에도 반복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수능은 절대평가 방식이지만, 내신은 9등급 상대평가인 까닭이다.
시험에 '변별력'을 주면 벌어지는 일
교내 시험은 무조건 일렬로 줄을 세워야 한다. 이른바 변별력을 확보하지 못한 시험은 출제 교사의 무능과 무책임을 드러내는 징표로 여겨진다. 성취기준과 수준을 고려하고 자발적인 학습 동기 부여를 위한 문항을 출제하라고 연신 강조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변별하고 나서의 문제다.
학생부교과전형과 학생부종합전형 등 수시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더욱 강조되는 현상이다. 변별력 확보에 실패하면 '의치한약'이나 SKY 진학을 꿈꾸는, 곧 교과별 1등급에 목매단 최상위권 아이들에겐 치명적이다. 상대평가 방식에서는 동점자의 수가 등급 구간의 범주를 넘으면 모두 아래 등급으로 내려간다.
예컨대, 해당 교과의 전체 대상 학생이 100명이라고 하면 상위 4명까지가 1등급이고, 5등부터 11등까지가 2등급이다. 2등급도 10명 중 1명 안에 든다는 뜻이니만큼 남 부럽지 않을 성적이다. 그런데도 2등급에 좌절하는 건 그 성적으론 수시로 '의치한약'과 SKY 진학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동점자가 5명 이상이 나오면, 규정상 해당 교과에서 1등급은 단 한 명도 없는 걸로 본다. 모두 바로 아래인 2등급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등급 구간의 폭이 상대적으로 넓은 3등급 이하에서는 동점자가 나올 확률도 적은 데다, 설령 아래 등급으로 내려간다고 해도 괘념하는 아이가 드물다.
대체로 중하위권 아이들은 성적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출제 문항의 난이도는 최상위권이 열쇠를 쥐고 있다. 시험 문제를 어렵게 출제하는 이유는 오로지 최상위권 아이들을 줄 세우기 위해서다.
그러자면 성취기준과 수준, 학습 동기 부여 등의 교육적 효과를 따질 겨를 없이 아이들이 무조건 한 문제라도 더 틀리도록 해야 한다. 교사에게 100점짜리 답안지가 썩 달갑지 않은 이유다. 성적 산출이 끝나면, 당장 최상위권의 동점자가 몇 명인지부터 확인해보는 것도 그래서다.
동점자를 없애려면 시험을 어렵게 출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각 출제 문항당 배점을 소수점 이하로 부여하는가 하면, 서술형 문항의 정답에 부분 배점을 촘촘하게 세분화하기도 한다. 채점 기준을 정교하게 설정해야 하는 번거로움 정도는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
시험의 목적이 오로지 줄 세우기에 맞춰지다 보니, 정작 시험 문항은 흡사 배배 꼬인 심사처럼 얄궂은 문제투성이가 된다. 굳이 알 필요조차 없는 시시콜콜한 내용을 다루기도 하고, 단어와 숫자를 슬쩍 바꿔 함정에 빠뜨리는 경우도 흔하다. 출제자로서 얼굴이 화끈거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억지춘향식으로 문항을 어렵게 만들다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러 재시험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재시험의 경우, 정답률이 100%에 가까워야 하므로 변별력을 높이려다 자충수를 둔 꼴이다.
현직 교사가 '절대평가'를 원하는 이유
단언컨대, 줄 세우기 목적의 시험으론 결코 아이들의 재능과 역량을 판단할 수 없다. 도덕 시험 점수가 높다고 도덕적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이치다. 아이들의 찰진 비유를 인용하자면, 예수님도 부처님도 '의치한약' 합격자의 도덕 교과 내신 등급엔 발밑도 못 따라갈 거라고 조롱했다. '공부 잘하는 악당'이 주변에 드물지 않다는 말도 덧붙인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선다형 방식의 시험만으로 무능을 들춰내거나 '악당'을 추려낼 수도 없다. 역사 과목 점수가 낮다고 역사의식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아이들 사이엔 논리력과 추론 능력이 탁월한 '수포자(수학 포기자)'도 많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더는 대학에서 수학할 수 있는 능력을 판별하는 시험이 아니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바다.
"학교와 교사에게 시험 문항을 쉽게 출제해달라고 부탁하기 전에, 학부모로서 교육부를 향해 현행 상대평가 방식을 절대평가로 바꿔 달라고 요구하는 게 낫습니다. 어떻든 일렬로 줄 세워 등급을 매기는 순간, 시험과 수업, 나아가 학교 교육과정 전체가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너 죽고 나 살아야 하는' 상대평가 체제에서는 옆에 앉은 짝꿍도 적일 뿐입니다."
학부모를 향한 이런 답변은 십중팔구 '에두른 꾸지람'으로 되돌아온다. 현실을 도외시한 철딱서니 없는 주장이라는 거다. 당장 등급이나 점수로 변별하지 않으면 대학에서 학생을 선발할 근거가 없지 않으냐며 반문한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목표에 대해선 아예 관심조차 없다. 교육과정도, 그들의 인식도 학벌 구조에 철저히 종속된 탓이다.
'웃픈' 이야기지만, '수포자'가 나날이 늘어만 가는 이유가 있다. 아이들 모두가 동의하는 수학의 불문율이다. 수학 시험에서 그냥 찍고 자는 게 열심히 푸는 것보다 점수가 높게 나온다는 것. 그러잖아도 어려워하는 수학인데, 변별을 위해 고난도 문항을 출제할 수밖에 없으니 대다수 아이들에겐 하등 의미 없는 시험이 되고 만다.
교사의 오지랖 때문일까. 우리 사회의 경제적 양극화보다 우리 아이들의 성적 양극화가 더 우려스럽다. 지금의 성적 양극화가 고스란히 미래에 경제적 양극화로 이어지고, 나아가 극심한 계층 갈등과 대립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변별에 애면글면하기보다 나날이 커져만 가는 성적 격차를 줄이는 것이 급선무다.
요컨대, 모든 교과에 절대평가 방식을 서둘러 도입해야 한다. 학습 동기를 부여하기는커녕 공부에 환멸을 느끼게 만드는 줄 세우기 시험으로 아이들을 괴롭히는 건, 차라리 '범죄'다. 상대평가는 교사에게도 가르치는 일의 보람을 앗아간다. 오로지 아이들의 등급을 올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만적인 교육을 이젠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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