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요즘 뭐 봐?]‘종이달’, 김서형이 마주한 진짜의 불행과 가짜의 행복 사이
김은구 2023. 4. 24. 06:08
한 번쯤 무리해서 해외의 럭셔리한 리조트로 여행을 가본 적이 있는 분들이라면, 그 짧은 며칠간의 ‘일탈’이 주는 행복감을 공감할 게다. 현실에서라면 월급의 상당액에 해당하는 숙박료를 지불하는 것에 주저하게 되는 게 당연하지만, 그렇게 일탈한 마음은 그 짧은 행복의 순간에도 기꺼이 거액을 지불하는데 너그러워진다. 하지만 그 짧은 일탈의 시간이 끝나고 돌아오면 우리는 또 다시 쫀쫀한 현실 속으로 들어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짧았던 일탈의 기억들을 그리워하며.
현실적으로 보면 이 짧은 일탈은 ‘가짜 행복’에 가깝다. 그 곳은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집도 아니고, 잠시 지불한 대가만큼 현실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일 뿐이다. 그러니 그 행복은 다소 무리해서 돈으로 지불해 얻은 잠깐 동안의 판타지에 가깝다. 반면 진짜 삶은 더 치열하고 혹독하다. 특히 자본화된 세상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이란 더더욱 그렇다. 가진 것으로 지위가 달라지고 그래서 누군가는 누리지만 누군가는 그들을 떠받드는 삶이 현실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진짜 삶은 불행하고 그래서 잠시 동안의 가짜라도 행복을 얻고자 하는 것.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화된 삶의 아픈 실체가 아닐까.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종이달’은 바로 이 진짜의 불행과 가짜의 행복을 섬세하게 그리는 작품이다. 유이화(김서형)는 돈 잘 벌고 야심 있는 남편의 테두리 안에서 남부럽지 않게 부유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이 어딘가 텅 비어 있다고 느낀다. 명예와 사회적 성공만을 향해 달려가는 남편은 그에게 ‘종이 모빌’ 같은 고분고분한 삶을 강요하고 심지어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인형처럼 상사들의 사교모임에 나서길 바란다. 그는 자신이 집에 아무 의미 없이 자리만 차지한 ‘빌트인’ 같다고 느낀다. 그래서 사교모임에서 만난 사람의 소개로 저축은행에 들어간다. 일을 하면서 자기존재를 찾고 싶어서다.
그런데 저축은행에서 그는 VIP 고객 관리를 담당하면서 일탈의 욕망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은 ‘돈의 위치’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면서다. 그가 만난 VIP 고객 박병식은 사채업로 자기 통장에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부자지만 여전히 돈에 집착하며 돈이면 뭐든 될 수 있다는 듯 툭하면 성추행을 하는 인물이다. 반면 그의 손자 윤민재(이시우)는 영화에 꿈을 갖고 있지만 촬영 중 사고를 당한 친구의 수술비가 없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박병식을 찾아와 돈을 빌리려 한다. 하지만 박병식은 손자에게도 맨 바닥에 침을 뱉고 닦으라는 등의 수모를 준다. 유이화는 생각한다. 박병식 같은 인간에게는 어마어마한 돈도 별 가치가 없지만, 윤민재 같은 전도유망한 청년에게는 단 500만 원도 엄청난 가치를 갖는다고. 그래서 박병식의 통장에 손을 댄다. “돈의 위치를 바꾸는 거야. 자신이 얼마를 가졌는지도 모르는 추악한 노인보다 꼭 필요하고 절박한 그 손자에게로.”
그러면서 유이화는 점점 이 윤민재라는 청년에게 빠져들고, 그를 욕망하게 된다. 그건 그저 단순한 육체적 욕망이 아니다. 돈으로 매겨지는 가치가 아니라 유이화 자체로서의 가치를 윤민재가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유이화 앞에는 그렇게 두 개의 세계가 펼쳐진다. 하나는 돈으로 지배되는 불행한 현실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을 벗어나 탈선함으로써 얻어지는 행복한 세계다. 진짜의 불행과 가짜의 행복 사이에 서서, 그는 가짜지만 그 행복에 깊숙이 들어가기 위해, 점점 과감하게 VIP 고객의 통장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동명의 일본원작 소설에서 ‘종이달’이라는 제목은 옛날 일본 사진관에서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만들고 그 밑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하던 시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장기불황의 시기에 나온 소설은 그래서 비록 가짜 달 아래에서 사진을 찍었지만 그 때의 행복을 그리워하는 당대의 정서를 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고도화된 자본 시스템 안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힘겨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아주 가끔씩 실제 삶을 벗어나는 일탈을 통해 그 짧은 행복감의 기억을 동력삼아 또 살아가는 건 아닐까. ‘종이달’을 애써 진짜 달이라 생각하며.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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