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망칠 '의대 블랙홀'…시골학원에도 '초등 의대반' 터졌다
대한민국이 이른바 ‘의대 블랙홀’에 빠졌다. 안정된 삶을 원하는 학생·학부모와 지방소멸 위기에 직면한 대학·지자체가 ‘블랙홀’에 빨려들 듯 의대에만 의존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수도권이 아닌 지방 중소도시의 학원에서도 ‘초등 의대반’을 모집하는 광고가 나오고, 난제로 꼽히던 지역 살리기마저 해법으로 의대가 제시되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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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학원도, 대학도, 정치권도 “의대만 믿는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목동 등의 입시 블랙홀은 의대 입시반의 연령을 더 낮추고 있다. 학원들은 재수생에서 초등학교 저학년생까지, 서울에서 지방까지 교육 대상을 넓히고 있다. 시골의 한 수학학원은 지난 3월 ‘초등 의대반’을 모집하는 광고글을 지역 맘카페에 올리기도 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지방 의대의 ‘지역인재전형’ 선발 비율이 최소 40%로 확대하면서 상대적으로 교육 낙후 지역이었던 지방으로까지 관련 사교육이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고교생이 지역으로 역유학하는 사례까지 등장했다.
재수학원에서는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N수생’ 마케팅이 자리 잡았다. 교육부가 민형배 의원실(무소속)에 제출한 바에 따르면 지난 3년(2020~2022) 동안 18개 의대의 정시 합격자 중 79%는 N수생이었다. 재수생이 43%, 삼수생 23%, 4수 이상 13%였다. 현역(고교 재학생) 합격자는 21%에 불과했다. 강남의 한 재수종합학원 관계자는 “올해 의대 재수반은 전년도보다 문의가 20~30% 늘었고 마감도 일주일 더 빨랐다”고 말했다.
의대를 노리는 수험생이 많다는 건 지방대나 지자체가 의대 유치전에 뛰어드는 이유가 된다. 총선을 1년여 앞둔 지역 정치권은 의대 유치에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최근까지 12곳이 도전하고 있다.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의대가 없는 전남에선 1년 전부터 목포·순천 등에 의과대학을 설치하기 위한 법안이 잇따라 발의됐다. 일부 지방대는 의대 유치·확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 신입생 부족으로 고사 위기에 처한 지방대와 지역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지방대는 의대가 없는 다른 지방대에 “통합 후 의대 정원을 늘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특수목적대학인 카이스트(KAIST), 포스텍(POSTECH) 등도 의과학대학 신설을 요구하고 있다. 경기도 포천시·가평군을 지역구로 둔 최춘식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9일 “경기도의 인구대비 도내 의과대학 정원수가 전국 꼴찌”라며 대진대에 의대 설립을 촉구하는 보도자료를 냈다. 안동시의회는 지난 17일 여야가 만장일치로 안동대 의대 설립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해 대통령실과 국회, 보건복지부에 전달했다.
부산의 한 사립대는 지난달 자율전공학부 학생들이 2학년 이후 선택할 수 있는 전공에 의예과를 포함하자고 제안했다가 의대생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신입생 충원율이 2020학년도에 100%였으나 지난해에는 90.4%로 내려앉자 내놓은 대책이었다. 의예과 학생회를 중심으로 “신입생 모집을 위해 의대를 ‘미끼’로 악용한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대학 측은 계획을 철회했다.
무분별한 의대 유치 경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김봉환 숙명여대 교육학부 교수는 “서남대학교는 의대가 있었는데도 폐교했다. 지금은 의대가 서울에 공대보다 높지만, 의대가 난립하게 되면 결국은 또 후발 주자나 열악한 지역에 있는 의대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며 “수요가 쏠린다며 단기적인 안목으로 의대를 늘려선 안 된다”고 말했다.
‘평생직장’…의대 정원 늘어도 30대 1
종로학원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의 자퇴·미등록 학생 1874명 중 1421명(75.8%)이 자연계열이었다. 입시업계에서는 이들이 대부분 의대로 빠져나간 것으로 보고 있다.
국가 경쟁력 약화, 교육 시장 왜곡 우려
채창균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의 직업별 경제 성장 기여도에 대한 논문들을 보면, 엔지니어는 플러스 되는 반면 변호사는 마이너스가 나온다”며 “좋은 인재들이 공학 계열 등 더 생산적인 곳에 가야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성호 대표는 “본질적으로는 다른 직군보다 의사의 연봉이나 안정성이 월등히 높기 때문에 지원이 쏠리는 것”이라며 “엔지니어 대우가 더 좋으면 학생들은 자연스레 공대를 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봉환 교수는 “많은 대학이 어떻게든 신입생 머릿수를 채워야 한다는 게 급선무가 됐고 지역 정치인들도 재선 등 자기 목적의 달성 방편으로 의대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다”라며 “고육지책으로 의대를 유치하려고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가람·최민지·장윤서 기자 lee.garam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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