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 처참했지만 변화 시작… 다음 시즌엔 기쁨 드릴 것”
프로농구 서울 삼성 썬더스 은희석(46) 감독은 지난 2월 16일 서울 SK와의 S-더비가 열린 잠실실내체육관에 양복 차림으로 등장했다. 그 전까진 시즌 내내 운동복을 입었던 그였다. 공교롭게도 이날 삼성은 올 시즌 최다 득점(113점)을 올리며 라이벌 SK를 패배 위기까지 몰았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삼성은 결국 연장 승부 끝에 SK에 패했다. 은 감독은 그 뒤로도 계속 양복을 입었고, 팀은 시즌이 마무리될 때까지 총 14경기에서 단 2승을 추가했다. 전임 감독 때부터 2년 연속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엔 6시즌 내리 나가지 못했다. 삼성의 불명예는 곧 은 감독의 불명예가 됐다. 대학 지도자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돌아온 프로농구였지만 초보 사령탑의 데뷔 시즌은 참담했다. 아시아쿼터부터 외국인 선수, 기존 선수단 몸 상태까지 어느 것 하나 예상대로 흘러가질 않았다.
지난 19일 경기도 용인 삼성 트레이닝센터에서 만난 은 감독은 변명보다 자책을 앞세웠다. 보다 많은 변수에 대비해야 했고 더 기민하게 움직여야 했다고 돌이켰다.
2013년 현역 생활을 마무리한 은 감독은 이듬해 모교 연세대 농구부 지휘봉을 잡았다. 성공적인 지도자 변신이었다. 2010년 출범한 대학농구리그에서 한 번도 정상에 서지 못했던 팀을 맡아 2년 연속 준우승시키더니 2016년 첫 우승까지 안기며 전성기를 열었다. 특정 선수에 과하게 의존하기보다는 선수를 고르게 활용하면서 팀을 강하게 만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다음 행선지로 객관적 ‘언더독’ 삼성을 고른 데도 이 같은 전력이 작용했다. 올 시즌 10개 구단 감독 중 최연소 사령탑이었던 그는 “젊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며 “(완전치 않은) 선수 구성 안에서 팀을 재건하고 팀 컬러를 개선하는 데엔 자신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실제 시즌 초 성적은 기대를 웃돌았다. 1라운드에서 6승 4패를 기록하면서 4위에 자리했다. 당연히 여론도 호의적이었다.
상황이 180도 달라지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시래 이호현 이동엽 등이 부상을 당했고 외국인 선수 이매뉴얼 테리가 부진한 가운데 사실상의 1옵션 역할을 해주던 마커스 데릭슨까지 무릎 골절로 전열을 이탈했다.
아시아 쿼터 제도는 그림의 떡이었다. 필리핀 국가대표 윌리엄 나바로가 필리핀농구협회의 이적 동의서를 받지 못하면서 틀어졌고, 크리스찬 데이비드와 저스틴 발타자르도 각각 부상과 ‘노 쇼’로 인해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2라운드부터 추락을 시작한 삼성은 13연패 수모를 겪으며 최하위까지 처졌고 그대로 시즌을 마감했다.
은 감독도 가장 아쉬웠던 지점으로 아시아 쿼터 영입 불발을 꼽았다. 허리 쪽에 힘을 보태줄 수 있는 파워 포워드 나바로가 갑작스레 팀 구상에서 빠졌고, 가드진이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무리하다 줄부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는 “시즌 중 연패에 빠지고 정신적으로 힘들 때 뼈에 사무친 게 아시아 쿼터”라며 “결국 그걸 메우려고 하다 5명이 연쇄적으로 다쳤다”고 토로했다. 심지어 이정현조차 알아채지 못했을 뿐 미세골절을 입은 상태였던 것으로 후일 드러났다.
외국인 선수 문제도 골칫거리였다. 기대를 품고 영입한 테리는 1옵션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마커스 데릭슨과 추후 대체 선수로 영입한 다랄 윌리스는 부상으로 제대로 못 뛰었다.
은 감독은 자신을 탓했다. 그는 “스카우팅을 할 때 보는 외국인 선수와 실제 한국에서 뛰는 스타일 사이엔 분명한 차이가 있더라”며 “인간 대 인간으로 설득하고 품어 가면서 빠르게 다른 활용 방안을 찾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되짚어 보면 영입 과정에서도 시행착오가 있었다고 했다. 데릭슨과는 먼저 계약을 체결했으나 테리는 지난해 서머리그까지 지켜본 뒤에야 영입을 결정한 것이었다. 은 감독은 “발빠르게 움직여서 1옵션을 확보해 놓는 게 급선무였는데 좌고우면하다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고 설명했다.
은 감독은 올 시즌 성적을 ‘처참하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수확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도 했다. 변화가 이미 시작됐다는 것이다. 지난달 27일 홈 최종전 당시에도 그는 비슷한 얘길 했다. 정확히는 ‘5부 능선’을 넘었다고 평가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바뀌었다는 것일까. 은 감독은 자발적인 훈련을 예로 들었다. “처음 왔을 땐 ‘시간 땡’하면 다 갔다. 여기 (감독실에) 앉아 있으면 아무도 안 왔다. 내가 가장 먼저 와서 가장 늦게 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2월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첫 훈련 시간대가 오전 7~8시인데, 전엔 다들 7시 30분에 나와서 8시 30분 전에 마치고 들어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9시가 돼도 바벨을 들고 무빙슛을 쏘더라. 이게 변화구나 했다.”
운동을 지나치게 많이 시킨다거나 강압적이라는 일각의 목소리에 대해선 명확히 선을 그었다. 프로로서 코트에 서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실력과 노력, 몸 상태를 갖추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하나로 뭉뚱그려 ‘자세’라고 표현했다. “자발적 훈련이 가장 좋다. 훈련장이 고요하면 그 팀은 망한 것”이라고 강조한 은 감독은 “아무리 시켜도 선수들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걸 해 주니 너무 고마웠다”고 말했다.
자세가 바뀌면서 성장이 따라왔다. 신동혁은 3점슛 성공률 44.92%를 기록하며 리그를 통틀어 국내 신인 선수 중 가장 두각을 드러냈고, 이원석도 정신적인 면에서 성숙하며 한 단계 도약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이들 신인급과 이정현 김시래 고참 라인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 줄 이호현 이동엽 등 중간 연차들도 ‘은희석 농구’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은 감독은 “(이)호현이는 학생일 때 프로-아마 최강전에서 처음 보고 농구를 좀 ‘살랑살랑’ 한다 싶어 아까웠다”며 “부임하고 나서 ‘독하게 한 번 해 보자’고 했고, 힘들었을 텐데 잘 따라와줬다”고 칭찬했다.
다음 시즌이 가장 기대되는 재목으로는 주저 없이 차민석을 꼽았다. 최초의 고졸 1순위라는 이름값에 비해 거듭된 부상으로 제 기량을 펼쳐보이지 못했지만 직접 지도해보니 습득력이 남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아직까진 경쟁자들에게 뒤처져 있지만 성장 속도가 워낙 빠르다”며 “언제 따라잡을까,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궁금할 정도”라고 칭찬했다.
은 감독이 스폰서 계약이 걸린 운동복 대신에 정장을 시즌 도중 꺼내 입기 시작한 건 ‘징크스’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분위기가 처진 선수들과 자기 자신에 대한 다짐에 가까웠다. 그는 “연패에 빠지면서 중심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좌절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싶어서 예복을 갖춰 입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동시에 끝 모를 부진에도 체육관을 찾아와 준 팬들을 향한 인사이기도 했다. 은 감독은 “선수들에게 ‘팬들을 생각해서라도 승패를 차치하고 최선을 다해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고 강조했는데 성에 차지 않으셨을 것”며 “진심으로 감사하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어 “선수들과 팀 컬러가 많이 발전하고 있다. 다음 시즌엔 더 좋은 경기력과 결과로 기쁨을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용인=송경모 기자 ssong@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바퀴가 90도로 돈다고?… 놀라워라 평행주차 기술
- 음주측정 후 “무릎 꿇어!”…경찰 멱살 잡은 女공무원
- ‘건축왕’ 2년 전부터 자금난… 전세금 조직적 인상 피해 커졌다
- FA결승 맨시티, 트레블 보인다… EPL 역전 눈앞, UCL 4강
- 학폭 폭로 표예림씨, 극단 선택 시도…“2차 가해로 고통”
- “마약 가방 돌려주세요”…선물까지 들고 왔다가 ‘철컹’
- 음주운전 한 달 만에 또 걸렸는데…항소심서 감형된 이유
- “아이유, 北간첩·대장동 주인공”…‘황당 유인물’ 살포
- “어? 잔돈으로 샀는데 5억원 당첨!”…행운의 주인공들
- “링거액 직접 조제했을 것”…故서세원, 개업준비 병원서 비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