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마약사범으로부터 온 편지

황인호 2023. 4. 24.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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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호 사회부 기자


한 통의 편지를 전달받았다. 마약사범 A씨가 쓴 편지였다. 11장에 이르는 편지에는 미로, 파편, 모래알 같은 단어가 많이 쓰여 있었다. 수감 중인 A씨가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암흑 속 빛을 찾고자 애쓰는 모습 뒤로 짙은 후회가 보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뇌’에서 톱모델 나타샤 안데르센은 마약중독 과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처음엔 메스암페타민 같은 각성제로 시작한다. 다음은 엑스터시, 코카인의 힘을 빌리고 이후엔 LSD에 손을 댄다. 마지막엔 헤로인을 찾는다”고. A씨도 비슷했다. 기분 전환을 위해, 호기심에 손을 댄 순간 마약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는 편지에 “지긋지긋한 마약, 모든 걸 망가트린 필로폰, 저 더럽고 추악한 마약이 (날 나락으로 떨어뜨린) 시초였다”고 썼다.

A씨가 보낸 편지에는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남자친구와는 마약을 하며 알게 됐다고 한다. 베테랑 형사 출신의 한 마약 관련 전문가가 “마약 하는 사람은 마약 하는 사람끼리 만난다”고 했는데 A씨도 그랬다. A씨는 이전 남자친구도 마약을 했다고 했다.

A씨는 마약 전과자지만, 편지 내용을 보면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마약은 그 자체가 범죄이면서 동시에 다른 범죄를 유발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경찰청의 ‘2018~2021년 마약류 투약 후 2차 범죄 발생 현황’에 따르면 마약류 투약 후 2차 범죄는 869건에 달했다. 교통범죄가 216건, 절도 214건, 폭행 87건, 강간 81건 등이었다. 살인도 9건이나 됐다. A씨 경우도 마약이 2차 범죄 트리거로 작용했다.

A씨는 남자친구와 동거를 했다. 무턱대고 찾아온 남자친구를 내치지 못했다고 했다. 상습적인 성 착취, 폭행 등이 이어졌다. 남자친구는 그런 A씨를 관찰하며 일기를 썼다. 협박은 일상이었다. A씨 부모를 언급하며 딸의 마약 전과를 알리겠다고 했다. 실제 그는 A씨가 보는 앞에서 A씨 부모에게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전화해 끊곤 했다. 그러곤 돈을 뜯어갔다. 그런 그의 옆에는 늘 마약이 있었다. A씨는 “귀신에 씐 것 같이 열등감, 피해의식으로 뒤덮여 자신의 감정을 내게 쏟아냈다. 약에 취하면 더 심했다”고 했다.

그러나 A씨는 남자친구를 신고하지 못했다. 그 역시 마약의 덫에 빠져 있었고, 모든 것이 발각되는 게 두려웠다. A씨는 자신의 마약 투약 사실이 밝혀지고 실형을 선고받고 나서야 남자친구를 강간, 절도, 상해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감옥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그 남자친구는 증거 불충분으로 불송치됐다.

A씨는 “지금은 그렇게 서글프거나 억울하지 않다. 나로 인해 시작된 일이니까”라고 했지만 그게 그리 쉽게 잊힐까. 편지엔 남자친구를 수사한 경찰에 대한 원망도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당연한 결과라고 씁쓸해 하면서도 코로나19를 이유로 (남자친구를) 대면 조사 한 번 하지 않고 무혐의 처리했다며 분개하기도 했다. 이 얘길 경찰에게 했더니 “대면 조사 없이 사건을 종결한 건 이상하다”면서도 “마약사범들은 거짓말도 많이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A씨는 마약으로 많은 걸 잃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잃은 건 자기 자신이었다. 몸과 마음이 망가졌고, 꽃다운 20대를 그렇게 흘려보냈다. 지금은 차디찬 감옥에 있다. A씨는 편지 말미에 ‘이젠 정말 끊겠다’ ‘다신 나를 방치하지 않겠다’ 등의 다짐을 빼곡히 적었다. 아마 A씨는 살면서 매일매일 이 같은 다짐을 할 것이다.

A씨는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붙여준 이름으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그는 새 이름처럼 마약 없는 새 삶을 살 수 있을까. ‘투약→수감→투약’이라는 마약중독의 회전문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새 이름 짓는 것보다는 어려울 것이다.

황인호 사회부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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