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1020의 '극단적 선택'

양성희 2023. 4. 24.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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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젊은층의 높아지는 자살률
한국 사회의 정신건강 위험수준
자살이 선택지? 예방효과도 의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대중의 사랑 속에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아이돌의 ‘극단적 선택’ 말이다. 이번에는 아스트로 멤버 문빈이다. 올해 25세. 아이돌 최고 춤꾼 중 하나였고, 늘 웃는 얼굴에 건강하고 밝은 이미지였다. 정확한 이유는 알 길이 없으나 K팝 특유의 경쟁 시스템 속에서 심리적 압박이 적지 않았다고 추측할 뿐이다. 문빈은 이달 초 해외 공연 때 컨디션 난조로 출국을 미뤘고, 공연 후 인터넷 라이브방송을 하면서 “조금 힘들었지만 내가 선택한 직업이니 내가 감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극단적인 선택을 해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긴 인기 아이돌 그룹 아스트로의 멤버 문빈. [뉴스1]

아이돌뿐이 아니다. 최근 서울 강남에서는 닷새 동안 3명의 10대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중 한 명인 10대 여고생은 그 과정을 SNS로 생중계했다. 현장에는 인터넷 커뮤니티(디시인사이드 우울증갤러리)에서 만난 20대 남성이 함께 있었는데 해당 여고생이 성착취를 당하고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됐을, 범죄의 가능성도 우려된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는 라디오 방송에서 “이는 성착취, 자살 조장, 마약 투약 등 최악의 조합이 다 모인 ‘진화된 n번방’ 사건”이라며 엄중 수사를 촉구했다. 디시인사이드의 사회적 책임도 강조했다. 이 외에도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30대 워킹맘, 전세 사기 피해자들, 성폭행 친부의 낮은 형량에 절망한 20대 딸 등 젊은이들이 잇따라 목숨을 버렸다.
우리나라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중 부동의 자살률 1위 국가다. 자살자 수가 OECD 평균의 2배를 넘는다. 자살률은 2011년 정점을 찍은 뒤 감소세였는데 최근 4~5년 다시 늘고 있다. 고령자 자살률은 줄고 있는 데 반해 1020은 증가하는 게 눈에 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대 자살률은 2017년(인구 10만 명당) 16.4명에서 2021년 23.5명으로, 10대 자살률은 같은 기간 4.7명에서 7.1명으로 늘었다.
2021년 자살 원인은 정신적 문제(40%), 경제생활(24%), 육체적 질병 문제(18%) 순이었다. 특히 젊은 층의 정신건강에 빨간 불이 켜졌다. 2021년 20대 우울증 환자는 2017년에 비해 127%나 늘었다. 20대 불안장애 환자도 87% 늘었다. 한국 사회 특유의 과당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 비교를 부추기는 SNS 등이 요인으로 거론된다.
높은 자살률의 방증일까, 우리에겐 자살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꺼리는 분위기가 강하다. 자살이나 죽음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하고, 자살자나 유가족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혹은 자살을 조장할 가능성(유명인의 자살을 따라 하는 베르테르 효과)을 경계하면서다. 지금 이 글도 그렇지만 한국 언론들은 한국자살예방협회와 함께 마련한 ‘자살보도 윤리강령’에 따라 ‘자살’ 대신 ‘극단적 선택’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런데 나종호 예일대 의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여러 인터뷰에서 “완곡한 표현을 하는 것이 자살을 줄이거나 예방한다는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이 도리어 자살을 가능한 하나의 선택지로 받아들이게 하며, 유족에게 선택의 이유를 따져 묻게 해 고통과 죄의식만 안겨준다는 설명이다. 해외 언론들이 자살이라는 중립적 표현을 쓰는 이유다. 인터넷에는 이런 댓글들이 있다. “몸이 아파서 죽는 걸 선택이라고 하지 않는데, 정신이 아파서 죽는 건 왜 선택이라고 할까.” “자살은 상황에 내몰려 하는 것이지 선택일 수 없다.”
중요한 건 ‘극단적 선택’이라는 우회적 표현에도 극단적 선택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 교수 말대로 “(자살이란) 문제를 직면하고 싶지 않은, 우리 사회의 방어기제”만 공고히 한 건 아닐까.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도 21일 “극단적 선택이란 용어의 자제”를 촉구했다.
세계 최고 자살률, 최저 출생률, 삶의 만족도 전 세계 59위, 아동·청소년 삶의 만족도 OECD 최하위(2022). 새삼 확인한 우리 사회의 성적표다. 최근 정부가 2027년까지 자살률을 30% 낮추는 제5차 자살예방기본계획을 세웠지만, 이 역시 수치 낮추기 실적 위주보다 사회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 노력이 동반될 때 의미 있을 것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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