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과 북한에 각각 자수한 어느 유명 시인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전두환 손자인 전우원씨처럼 조상의 잘못을 사과하는 데 적극성을 보인 인물이 있다. 친일파인 김동환의 아들인 김영식씨가 그런 사람이었다. 1994년에 펴낸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에서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라며 용서를 빌었다.
▲ "부친의 '친일죄과'를 대신 사죄합니다." 파인 김동환의 3남인 김영식씨는 지난 94년 부친의 일대기를 펴내면서 서문 말미에 부친의 친일행적에 대해 민족과 역사 앞에 대신 사죄한다고 밝힌 바 있다. |
ⓒ 오마이뉴스 권우성 |
그런데 김동환 본인도 그런 자발성을 보인 일이 있었다.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친일파 체포 작업이 한창일 때 발행된 1949년 3월 1일 자 <경향신문> 기사 '김동환 자수'는 "김동환(삼천리사 주간)은 작(昨) 28일 오후 2시 반민특위에 자진 출두하여 과거의 친일 행위에 대한 적당한 벌을 민족 앞에 받아야 할 것이라고 자수"하여 왔다고 보도했다.
같은 달 3일 자 <동아일보> 2면 좌단에 따르면, 그 직전까지 반민특위는 영장 발부 일주일이 지나도록 김동환을 체포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재가 불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도주했다는 소문이 떠돌던 차에 자진 출석하는 그를 맞이하게 됐던 것이다.
자수 직후에 그는 <삼천리> 3월호 발간을 준비하느라 바빴다며 "3월호 편집이 끝나면 출두할 각오로 있었던 것으로 3천만 민족 앞에 적당한 벌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것은 나의 오랜 숙원이었다"라고 밝혔다.
김동환은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로 시작하는 '국경의 밤'이란 서사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01년 생인 그가 만 24세 때 지은 이 작품은 두만강 유역에 사는 식민지 한국인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여줬다.
김동환이 1927년에 작사하고 가수 박재란이 1965년에 히트시킨 '산너머 남촌에는'은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공화당 후보의 캠페인 송으로 사용됐다. 선거를 여드레 앞둔 그해 4월 25일 발행된 <조선일보> 7면 좌상단 기사는 박정희 후보의 23일 대구 수성천변 연설을 보도하면서 "유세가 시작되기 전 마이크에서는 가수 박재란 양의 '산너머 남촌' 등 가요곡이 흘러나와 시골 장날처럼 흥청거렸다"고 전했다.
"산너머 남촌에는 누갈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풍기는 작품으로 평가됐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사랑을 받던 김동환의 가사가 같은 친일파의 선거송으로 활용됐던 것이다.
1965년 8월 4일 자 <경향신문> 5면 좌상단 기사는 그해 상반기 대중가요를 결산하는 대목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노래가 박재란이 부른 '산너머 남촌에는(김동현 작곡)'이다"라며 "더욱 놀라운 일은 이 노래가 일본 가수 와다나베 하마꼬가 옛날에 불러 히트한 노래와 무섭도록 같다는 사실"이라고 비판했다.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뜨거웠던 시기에 보도된 이 기사는 일본곡 표절 의혹이 있다는 점은 지적하면서도 작사자가 친일파였다는 점은 언급하지 않았다.
문인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소양마저 망각
본인과 아들이 친일 부역행위를 사죄하기는 했지만, 김동환의 친일은 적당히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문인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소양마저 망각한 채 일본 군국주의 찬양에 앞장섰다. 그래서 그의 친일은 경각심을 주는 사례로 계속해서 기억될 필요가 있다.
1901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해 일본 도요대학을 중퇴한 뒤 1924년 문단에 데뷔한 김동환은 <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일보> 기자 등을 거쳐 1929년부터 종합 잡지사 삼천리사를 운영하면서 유력 인물로 성장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동환 편에 정리된 프로필에 따르면, 그는 유학 시절에 재일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1925년부터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서 활동했다. 또 1927년에는 프롤레타리아 연극단체인 불개미극단을 창단했다. 1930년에는 좌우 합작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 <삼천리>를 발행하던 당시의 파인 김동환과 문인들. 왼쪽부터 춘원 이광수,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그리고 파인. 최정희와 파인은 한때 동거했었다. |
일제에 충성하는 문인으로 바뀐 뒤에 그는 자신의 밑바닥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거짓으로 글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노출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1943년 11월 7일 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권군취천명(勸君就天命)'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도 병(兵)되여 생사를 나라에 밧치지 안엇던들
지금쯤은 충청도 두메의 일흠업는 농군이 되여
베옷에 조밥에 한평생 뭇겨 지내엇겠지
웬걸 지사, 군수가 그 무덤에 절하겟나
웬걸, 폐백과 훈장이 그 제상(祭床)에 내렷겟나
이인석이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세상이 그에게 관심이나 보였겠느냐는 시다. 세상의 주목을 받으려면 이인석처럼 죽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시였던 것이다. 42세의 김동환이 한국 청년들을 '영광의 길'로 몰아넣고자, 말도 안 되는 비인간적인 시를 써냈던 것이다.
그는 전방으로 투입될 청년들뿐 아니라 후방에 남을 여성들에게도 그런 식의 충동질을 했다. 1942년 5월에 발표한 '군복 깁는 각시네'에서는 군복을 수선 중인 부녀들을 염두에 두고 군국주의적 메시지를 보냈다.
이 시에서 그는 "군복 입은 남편이 어떻게 빛나 보일까/ 사내 된 이 살아서 군복을 입고, 죽어 국기에 말려 묻힐 것을"이라고 읊었다. 당신들의 남편은 살아서는 군복을 입어야 빛나 보이고, 죽어서는 국기에 말린 채로 돌아와야 빛나 보인다고 쓴 것이다.
그런 뒤 "조선의 여인도 인제는 전장에 달리는 젊은이에 꽃다발 드리노라/ 치마폭에 한아름 안아 드리려노라"라고 읊었다. 후방의 여성들에게 비장함을 안겨주어 사회적으로 전쟁 분위기를 고양시키려는 일본제국주의의 의도에 영합하는 시다.
북한군에 자수한 뒤 행방불명
김동환은 창작뿐 아니라 단체 활동에서도 활발한 친일을 이어갔다. 1939년에는 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결성에 참여해 간사를 맡았고, 1941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흥아보국단 준비위원, 임전대책협력회 상임위원,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가 됐다. 1942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선전부 위원과 참사가 됐고, 1944년에는 국민동원총진회 상무이사가 됐다.
▲ 파인 김동환이 조선일보 총독부 출입기자 시절 총독부로 받은 촌지를 모아 창간한 잡지 <삼천리>. 이 잡지는 초창기 민족적 색채가 짙었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잡지로 돌아섰다. |
공민권 5년 정지를 선고받은 그는 얼마 안 있어 또다시 자수했다. 이번에는 북한에 대한 자수였다. <친일인명사전>은 "6·25전쟁 개전 후인 7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정치보위부에 자수한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자수'를 자신의 캐릭터처럼 만들어놓은 그는 납북됐다는 소문을 남긴 채 "산너머 남쪽"에서 사라지게 됐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눈물겹도록 고맙다... 전교생 6명 중학생들이 사는 법
- 윤 대통령 국정은 '무개념, 무능력, 무데뽀, 무책임'
- '혹시라도... 우리 엄마 좀 부탁해' 그날 밤, 딸의 마지막 당부
- 엄마를 이해하고 싶은 딸을 위한 참고문헌
- 미리 알려줄게, 40대의 우정이란 이런 것
- 다섯 번 땀 닦은 송영길 "민주당 탈당, 월요일 3시 귀국"
- 내성천 수백 그루 나무 싹쓸이 벌목, 왜?
- 전세사기 특별법 만든다지만... 재정투입 없고, 절차 그대로
- '학자금 이자감면' 강행 시사한 이재명... 이태규 "선동 멈춰야"
- 미, 특수부대 동원해 수단서 자국민 철수... 대사관 폐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