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가죽으로 새 생명 만들죠" 4대째 가업 잇는 악기장 형제 [가업 장인을 찾아서]
"죽은 나무와 죽은 소가죽으로 새 생명을 만드는 일."
윤종국 악기장은 북을 만드는 일을 이렇게 설명했다. 윤종국 악기장(62) 보유자와 윤신(60) 악기장 전승교육사는 4대째 내려오는 악기장 가문의 두 살 터울 형제다. 증조부 때부터 기법이 전수됐다. 이들의 아버지인 고 윤덕진은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에 사용된 '용고', 청와대에 전시된 '문민고'를 만든 알아주는 악기장이다. 윤씨 형제를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서 만났다.
4대째 이어온 가업인 만큼 승계가 자연스레 이뤄졌을 것 같지만, 윤 보유자는 38년 전 "이제 본격적으로 북을 배우라"는 선친의 말에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고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피비린내 나는 소가죽과 씨름하며 북을 메웠던 고된 일을 물려받으라는 아버지의 통보는 갓 군대를 졸업한 24살 청년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던 것. 며칠을 떠돌던 그는 "(악기장은)죽은 나무와 죽은 소가죽으로 새 생명을 만드는 일"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곱씹으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난해 악기장 보유자로 인정되기까지 평생을 바쳤다.
장남이 총대를 메자 차남(윤신 악기장 전승교육사)과 막내(윤권 악기장 이수자·55)도 직장에 사표를 내고 공방에 들어앉았다. 차남은 국민은행, 막내는 대우조선해양에 다녔다. 모두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이었다. 윤 보유자는 "아버지와 형이 고생하는데 혼자 양복 입고 넥타이 맬 수는 없다며 둘째가 공방을 찾아왔을 때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북 만드는 작업은 2인 1조가 기본이다. 나무 틀에 맞춰 한 사람이 소가죽을 당기면 다른 한 사람이 못질을 한다. 형제들의 도움이 절실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형제는 아버지의 매질도 사이좋게 나눠 맞았다고 했다. 한겨울에 기차를 타고 논두렁을 건너 도착한 동두천 가죽 공장에서 소가죽 고르는 법을 배울 때의 일이다. 가죽을 품에 안고 돌아오는 서울행 기차에 오르면 얼었던 가죽이 녹아 비린내가 진동했다. 따가운 눈총을 피해 화물칸으로 몸을 피하면 다시 가죽이 얼었다. 그렇게 얼룩이 핀 가죽을 배달받은 아버지는 아무 도구나 손에 잡히는 대로 형제를 때렸다. 얼었다 녹은 가죽은 좋은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걸 형제는 그렇게 배웠다.
북을 치우면 침실이 되고 북을 들이면 공방이 되는 집에서 평생 북 만들기를 함께 배우며 자란 형제라서일까. 좋은 소리를 구분하는 이들의 마음은 그야말로 이심전심이다. 윤신 전승교육사는 "좋은 소리가 무엇인지 우리끼리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다"며 "한 사람이라도 이 소리는 아니라고 하면 바로 북을 뜯는다"고 했다. 이미 못질을 한 가죽을 뜯으면 다시는 쓸 수가 없다. 소리가 성에 차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가죽을 뜯는 결기는 아버지의 소리를 잇기 위한 형제의 불문율이었다.
삼형제가 만드는 북은 주로 사찰에서 쓰인다. 봉선사·용문사·대광사·서산사 등 전국의 이름난 절에서 쓰는 법고(法鼓)를 이들이 만들었다. 지름 2m, 폭 2m에 달하는 법고는 삼형제가 모두 달려들어도 만드는 데 꼬박 3개월이 걸린다. 목재소에서 소나무를 구입해 말리고, 썰고, 대패로 다듬고, 붙이고, 가죽을 씌우면 비로소 붓으로 전통 단청 무늬를 입히는 마무리 작업에 들어간다. 윤 전승교육사는 "나무토막이 북이 되기까지 시작과 끝을 모두 보기 때문에, 마지막 단청 작업을 할 때는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예쁜 옷을 입히는 기분"이라며 "마무리 과정까지 공을 들여야만 좋은 북이 나온다"고 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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