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까지 기록한 17살 '해적'... "이 아이의 시선이 좋았어요"
[곽우신 기자]
▲ 첫 공연의 재미 “진짜 100% (김)려원 언니 덕분이었어요. 뭐랄까요. 진짜 완전 오지로 여행을 갔는데 한국말 들리면 반가운 것처럼? 너무나도 긴장되고 ‘어떡하지, 어떡하지’ 했는데, 딱 무대에 서서 (김)려원 언니를 보는 순간 그 안정감과 익숙함이 확 몰려오면서 긴장도 좀 풀어지고, 즐기게 되고, 또 재밌어지는 거죠. 오히려 정연 언니랑 (김)수연이가 첫 공연을 하는 걸 모니터링했는데, 객석에서 제가 너무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어요. 보는데도 진짜 너무 긴장되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에 막 오열했어요. (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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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봐, 내가 별을 쏜다. 별에 명중하면 내가 이긴다. 잘 봐, 내가 별을 쏜다. 별이 부서지면 나는 바다로 간다." - 뮤지컬 <해적> No.07 '스텔라 마리스(Stella Maris)' 중에서
캡틴 칼리코 잭은 아마 그 장면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술에 취했고, 실제로 사람 한 명 죽여본 적 없는 그이지만, 잭의 사격 솜씨는 나쁘지 않았다. 술집 간판 '앤 보니'의 A에 총구멍을 냈고, 수탉 모양 풍향계의 꽁지를 날려버렸다. 잭과 앤의 '슈팅 매치'는 본래 무승부여야 했다. 하지만 해적선을 너무나 타고 싶었던 앤 보니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마지막 승부를 제안하며 '별을 쏘겠다'라는 앤의 선언에 잭은 코웃음 쳤다.
잭의 총알은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앤의 총알은 달랐다. 두 자루의 권총에서 쏘아진 불꽃은 하늘의 별을 부서트렸고, 산산이 부서진 별의 조각들이 빛나는 가루가 되어 밤하늘에 떨어졌다. 하늘의 별마저 쏘아 명중시키는 총잡이를, 잭은 그의 배에 태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비록 여자는 배에 태우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규칙은 이미 잭도 어길 대로 어긴 상황이다.
이영도의 소설 <폴라리스 랩소디>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소설 속 새벽의 사수는 첫 번째로 떠오르는 태양을 활로 쏘아 떨어뜨린다. 그저 전설이라고만 생각하고, 아무도 믿지 않았던 사람들 앞에, 진정한 왕위 계승자는 정말로 새벽의 눈동자를 꿰뚫어 본인이 새벽의 사수라는 것을 증명한다. 검은 바다 위에서 해적들의 밤길을 인도하던 스텔라 마리스, 해적들의 수호성은 어쩌면 앤에게 배를 탈 진정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준 게 아닐까.
"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장면이죠. 보시는 분들도 '저게 무슨 장면인가?' 이렇게 생각하실 텐데, 정말로 총알로 별을 쏠 수는 없잖아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더라고요. 어떤 분들은 '이게 유성우다, 앤이 그 타이밍을 계산한 거다'라고 해석하기도 하시고… 또 하나는, 이 <해적>이라는 작품 자체가 루이스가 쓰는 항해일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잖아요? 앤이 무언가를 쏴서 떨어지는 장면이 잭에게는 그렇게 보였고, 그걸 루이스가 작가적 상상력을 더해서 그렇게 썼다는 해석도 있더라고요.
모르겠어요. 정말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저도 약간 그런 쪽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모든 이야기가 루이스의 시선으로 쓰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작품 안에 보면 어떤 동화적인 표현들도 있어요. 인물들을 그리는 방식과 시선도 루이스의 관점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장면들을 해석했거든요. '이건 뭡니다'라고 딱 잘라서 말하기는 조금 어렵지만, 그 두 가지를 다 생각하면서 그 장면을 했던 것 같아요."
잭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루이스는 자신의 항해일지에 그 장면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뮤지컬 <해적>에서 앤 보니와 루이스를 함께 연기하는 배우 김이후는 그때를 "잭이 정말로 앤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던 순간"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 시즌 <해적>에 다시 승선한 이 배우는 자신이 받는 질문을 곱씹고, 의미를 되물었다. 답변을 신중하게 고르기 위해 시선을 돌리는 그의 눈망울에는 스튜디오의 조명이 별처럼 맺혔다. <해적>이 출항한 후 한참 순항 중인 4월 중순, 작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배우 김이후를 대학로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나 기록했다.
▲ 기대와 부담 “물론 그 전에 잘해놓아 주신 게 있다 보니까, 팬들의 <해적>에 대한 기대치도 있고, 또 여배우 페어에 바라는 기대치도 있죠. 그런데 그게 오히려 좋았어요. 좋은 부담감이랄까요? 물론, 잘 해내야겠다는 부담감은 말도 못하게 컸죠. 려원 언니랑 저랑 진짜 바들바들 떨면서 처음 시작했었고, 지금도 그래요. 하지만 젠더 프리이기 때문에 오는 차이점, 거기에서 오는 자유로움들이 있거든요. 이 작품을 하면서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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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의 황금시대 이야기, 보물과 북극성과 부서진 나침반과 졸리 로저. 해적들이 폭주하는 바다, 포세이돈이 지배하던 바다." - 뮤지컬 <해적> No.01 '해적의 황금시대' 중에서
나침반의 발명, 항해술의 발달, 신대륙의 발견.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식민지를 착취해서 얻은 막대한 부가 유럽대륙으로 흘러 들어오던 시기. 그 가운데 길게 봐도 100년도 채 되지 않던 해적들의 황금시대가 있었다. 유럽으로 흘러 들어온 황금과 사치품은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국가의 재화는 넘치지만, 그 분배는 이전부터 그랬듯 불평등했다.
▲ 이후의 꿈 “‘드림 롤’로 이렇게 생각하는 건 없어졌어요. 물론 <레드북>의 안나라든지, <키다리 아저씨>의 제루샤라든지, <위키드>의 엘파바라든지, 이렇게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과 좋아하는 캐릭터들은 있고 그걸 맡으면 너무 행복하겠죠. 하지만, ‘이걸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좀 아쉬울 것 같아요. 무궁무진한 캐릭터들을 또 발견해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 더 커진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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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이후가 맡은 배역은 "누구나 첫눈에 반하는 해적"이자 총잡이인 앤 그리고 "모험을 꿈꾸는 용감한 아이" 루이스이다. 스스로 앤 보다는 루이스에 더 가깝다고 여겨왔던 김이후는, 2년 만에 다시 <해적>을 만나면서 이전보다 앤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저번 시즌에 공연할 때는 제가 거의 망설임 없이 '루이스요!' 이렇게 했어요. '좋고, 싫고'가 아니라 '나는 루이스랑 좀 닮은 것 같아요'라고 늘 말해왔었는데, 이번 시즌에 다시 돌아와서 공연하면서 제가 표현하는 앤에게도 제가 좀 많이 묻어나는 것 같더라고요. 부쩍 앤과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아요. 글쎄요, 왜 그럴까요?
저는 앤을 표현할 때 '굉장히 단단한 인물'이라고, '그 단단함을 닮고 싶어요'라고 많이 이야기를 해왔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그때보다 조금 더 앤처럼 단단해진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외적으로라기보다는 내면적으로, 내가 뭔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어 내는 데 있어서 차분함과 단단함이 아주 조금은 생긴 것 같아요.
루이스와 앤의 차이를 굳이 말하자면, 각자 시간을 보내온 방식이 다르다는 건데, 앤은 굉장한 결핍에서 오는 갈망이 되게 센 인물이잖아요? 여자로 태어났고, 사생아로 태어나서, 기록되지도 못하고, 존재가 계속 부정당하는 환경에 처했기 때문에 그거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강해진 사람이죠. 앤의 그런 삶의 방식이 멋있다고 느꼈고, 그렇게 살려고 저도 노력했던 것 같아요. 어려운 상황들에 처했을 때 도망가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버텨나가고 단단해져 가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조금은 앤처럼, 아주 조금은 닮아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 앤을 연기하면서 “사실 앤은 메리한테 ‘살아볼게’ 하고, 인사하고, 소대로 나와서 울음이 더 터져요. 그러니까 퇴장할 때까지는 메리를 인식하고 있으니까 참고 있다가, 무대에서 나와 버리면 이제 제가 눌러 왔던 게 확 터지죠. 그런데 메리의 노래가 시작될 때까지 또 조용하거든요. 그사이에 울면 안 되니까 참고 있다가, 메리의 노래 시작되면 주변에서 다 ‘지금, 지금이야’ 이러면 그때 되어서 코 풀고 울고 이렇게 해요. (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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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아나선 위대한 군신, 내가 꿈꾸었던 전사를 만나는 순간, 바로 이 순간, 이 세계는 무너지고, 나는 다시 태어난다." - 뮤지컬 <해적> No.11 'Love at First Sight' 중에서
앤 보니는 메리 리드와 함께 역사에 기록된 '유이'한 여성 해적이다. 작품 속 앤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사생아라는 이유로 교회로부터 세례도 받지 못했고, 이름도 남길 수 없었다. 이 세계에 본인이 존재했음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혼인서약을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참금을 노린 제임스 보니와 결혼해 보니라는 성을 쓰게 됐지만, 시대와의 불화는 끝나지 않았다.
술집을 운영하던 그는 술에 취한 잭으로부터 보물섬(로즈 아일랜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배에 태울 총잡이가 필요하다던 그와의 사격 대결을 통해 본인의 실력을 증명한다. 서로의 이익을 위한 형식상의 결혼이었음에도 결혼 제도는 여전히 앤을 구속하고 있었고, 그는 육지의 신 야훼 대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섬기기로 하며 자유를 찾아 바다로 뛰어든다. 그리고 그는 바다 위에서 포세이돈의 현신이자 군신, '검투사' 메리 리드를 마주하게 된다.
"돛대 위에서 메리의 뒷모습을 보고 '저 사람이랑 붙어봐야겠다'라며 총을 넣고 내려와서 딱 마주치는 순간, 공연에서 그 장면이 두 사람의 첫 눈빛 교환이거든요. 그런데 살아온 삶의 궤적이 비슷한 사람들은 풍기는 분위기도 조금씩 닮아 있잖아요? 특히나 앤과 메리가 처한 상황은 굉장히 특수한 상황이었잖아요. 바다에 일단 여자가 나오는 게 정말 쉽지 않은 상황이었고, 둘 다 남장을 하고 해적선을 타서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솔직히 첫눈에 딱 봤을 때 서로가 닮은 게 느껴질 거라고 생각해요.
첫눈에 반해서 저 사람에게 호감을 품고 다가가려는 게 보통이라면, 앤과 메리는 첫눈에 이끌림을 느꼈지만 그 순간에 처한 상황이 전투이다 보니까, 그 상황 자체가 만들어 내는 게 또 있는 것 같아요. 앤과 메리는 정말 빠르게 서로를 그냥 알아봐요. 서로의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지금의 서 있는 모습 그 자체로 저 사람의 인생이 딱 유추되는 거죠.
▲ 새로운 페어 “‘누구와 누구가 만났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이렇게까지 달라지는구나’를 제가 몸으로 이렇게까지 느낀 건 처음이에요. 페어마다 무대 위에서 고유의 것들이 탄생하는데, 정연 언니랑 연습할 때도 그랬어요. 언니가 먼저 저한테 오셔서 ‘내가 수연이를 만났을 때의 캐릭터와 너를 만났을 때의 캐릭터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이야기를 좀 해보자’ 하셔서 굉장히 감사했어요. 분명히 정연 언니를 만나보니까 또 다른 표현들이 나오고 저의 캐릭터가 바뀌더라고요. 그 상호작용을 이번 시즌에 페어가 섞이면서 처음 느꼈고, 그 부분이 신선하고 재밌고 많이 배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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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앤과 메리가 실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작품 속 앤과 메리는 서로가 닮은 존재라는 걸 첫눈에 알아차렸고, 서로가 서로를 기꺼이 구속한다. 역사에서 그랬듯 작품에서도 앤과 메리는 끝까지 싸웠고, 체포되어 '밧줄 춤'을 추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메리의 교수형은 정해져 있었지만, 앤에게는 아버지의 보석금이라는 선택지가 있었다. 앤은 메리와 함께 죽음을 택하려고 하지만, 메리의 설득과 만류 끝에 살아남아 그를 영원히 추억하는 쪽을 택한다.
"정말로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앤이 살아남는 거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에 메리한테 '네 뜻대로 살아볼게'라고 하고 걸어서 나가는 거는 정말 온전히 100% 메리를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이고, 메리를 위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앤이 만약 자신을 생각했다면 정말 살고 싶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정말로 같이 죽고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사람의 마지막은 이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거죠. 내(앤)가 살아야 편하게 죽을 수 있다고 하니까, 너무 사랑하니까…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해주는 게 사랑이니까요.
저는 작품 속 인물들이, 작품 이후에 어떻게 됐을지 잘 고민하거나 상상하지 않아요. 하지만 앤이 메리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켰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요. 메리와의 약속을 마지막까지 지키기 위해, 끝까지 잘 살았을 거예요. 앤의 남은 생에, 그 삶의 과정 중에 또 다른 행복들이 찾아왔을 것이고, 메리를 위해서 잘 살아냈을 것이라는 정도의 생각이요. 메리와의 약속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 말 그대로 충실히 살아냈을 것이다."
▲ 다시 만난 루이스 “지난 시즌 끝나고 나서 ‘루이스를 참 많이 좋아했나 보다’라는 게 느껴졌어요. 이 캐릭터를 너무 사랑하다 보니까, 그냥 그 사람으로 사는 시간이 참 행복했죠. 지금도 제 별다방 닉네임이 루이스거든요. (웃음) 그만큼 진짜 좋아하는 캐릭터라서, ‘매일 무대에서 행복했던 기억’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게 <해적>이고, 그래서 이번에 합류해서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것도 있고 그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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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유서를 썼는데, 지금 항해일지를 쓰고 있어. 내 유서는 본 사람 없잖아. 항해일지를 볼 사람도 없잖아. 그러니까 발길 닿는 곳으로 내 마음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슴이 이렇게 뛰는데, 꿈을 꾸지 않을 수 없잖아." - 뮤지컬 <해적> No.05 '항해일지' 중에서
17살의 "모험을 꿈꾸는 용감한 아이" 루이스도 해적선을 탔다. 앤이 동명의 역사 속 실존 인물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반면, 루이스는 순수하게 창작된 인물이다. 루이스가 해적선을 타고 싶었던 건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바다로 갔고, 바다 냄새를 풍기며 돌아와 해먹에서 잠을 자던 아버지 '케일럽'의 꿈을 좇아 그도 바다로 향한다.
잭이 찾던 보물섬 지도를 삼켜버리고, 보물섬에 데려가 달라고 그를 조른 끝에 해적선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평했던 대로 "똑똑한 루이스"는, "소설을 쓰겠다고 학교를 그만둔 멍청한 루이스"는 펜을 들고 항해일지를 쓰기 시작한다.
"저는 작가들에 대한 동경이 있거든요. 소설책도 읽는 걸 좋아하고요. 루이스는 글을 쓰는, 항해일지를 적기도 하고 그다음에 해적 이야기를 쓰기도 하는 작가잖아요. 그래서 이 아이의 시선이 참 저는 좋았어요. 뭔가를 쓰려고 생각하고 그 상황을 겪으면 그냥 한순간 한순간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굉장히 더 열심히 보게 되고, 주의 깊게 듣게 되고, 상황을 인지하는 시선이 열리잖아요.
루이스가 딱 그런 인물 같아요. 배에 탄 모든 인물들에게 시선이 향해 있고,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 표정 얼굴 감정 이런 것들을 굉장히 주의 깊게 관찰하는 인물이죠. 그러면서 동시에 그 시선이 되게 따뜻하다고 느껴졌어요. 제가 스쳐 지나갈 법한 사소한 것에 괜히 마음이 끌리는 성향이 있는데, 작품에서 묻어나는 루이스의 시선에도 그런 부분들이 저랑 닮았다고 생각을 했어요. 이야기를 좋아하고, 모험을 좋아하고, 뭔가 항상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꾸고..."
루이스는 스스로 "모태 해적"이라고 평하지만, 잭의 해적선에서 조금은 결이 다른 존재이다. 해적들이 자신들의 비밀 이야기를 루이스에게 자꾸 털어놓는 것도, 그의 시선과 관점이 보통의 해적들과 달리 섬세하고 따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전투가 벌어질 때, 루이스만큼은 숨어 있어도 괜찮다. 해적들은 무식해서 항해일지를 쓰지 않지만, 루이스는 혼자 항해일지를 꼼꼼히 쓰고 있다.
마지막 순간, 잭은 재판정에서 루이스는 해적이 아니라고, 그러니 이 아이는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자신도 해적이라고 외치는 루이스에게, 잭은 살아남으라고, 그래서 항해일지를 완성하라고 이야기한다.
"앤과 메리가 끝까지 싸우는 걸 지켜보고, 앤이 '해적답게 바다에서 죽을 수 있었어'라고 외치는 와중에도, '나의 머릿속에는 밧줄 춤만 가득했다'라고 말하는 루이스의 마음속에는 공포심과 공포를 느끼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동시에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잭이 '이 아이는 우리 일행이 아니고 심부름시키려고 납치한 아이'라고 했을 때, 루이스는 '잭이 나의 공포심을 알았나' 하는 수치스러움도 있고, 나 자신이 비굴하게 느껴지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있었겠죠. 그래서 '나도 해적이야'라고 외치는 게 그 부끄러움과 싸우는 루이스의 말이라고 생각해요.
그거를 확 눌러버리는 잭의 말이 '너, 기록해야지' 이거잖아요. 그런 기록자의 성향이 루이스의 굉장히 반짝반짝한 면모이고, 자기도 그걸 알기 때문에 남아서 항해일지를 쓰지 않았을까 해요. 상상을 해보면, 이 아이는 해적들의 밧줄 춤을 무서워하지만, 그 밧줄 춤 자체보다 이를 지켜보는 군중의 조롱, 그 조롱의 유독성을 더 무서워하거든요. 루이스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그 조롱의 한복판에, 자기만 살아남아서, 자기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잭이 조롱과 야유와 유흥거리로 전락해서 죽으러 가는 그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죠.
그런 군중들의 모습을 알기 때문에 루이스는, 자기가 아는 이 사람들의 모습을 정말로 멋있게, 저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이야기를 쓰기 위해, 겁이 나지만 그 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 잘 버티기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있어요. 배역이 있어야 배우가 있는데 배역 자체가 없다거나, 있다고 해도 인물이 좀 전형적이라든가 납작하다든가…. 그런 아쉬움들이 항상 있었을 것 같고, 지금도 있긴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체감하는 아쉬움은 좀 달라요. ‘너 대단하다, 여자인데’ ‘너 정도면 여자 배우치고 일 진짜 많이 하는 거야’ 이럴 말을 들을 때요. 그 말에 이미 함축된 의미가 있잖아요? 물론, 제가 운이 좋고, 정말 감사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잘 버텨야겠다’ ‘잘해야겠다’라는 생각도 커요. 단순히 성별의 문제를 떠나서, 모두가 더 재미있는 여자 캐릭터를 원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아직 모자라죠. 저는 욕심이 너무 많거든요. (웃음) 훨씬 더 다양해져야 하고, 제가 저에게 주어진 것들을 열심히 잘하면 그만큼 더 새롭고 재밌는 것들이 생겨나겠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하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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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으로 목격한, 내 손으로 기록한, 내 온몸에 각인된, 내 영혼에 사무친, 캡틴과 총잡이와 검투사 해적들의 황금시대 이야기." - 뮤지컬 <해적> No.22 '피날레' 중에서
그렇게 루이스가 남긴 항해일지는 뮤지컬 <해적>의 바탕이 된다. 항해일지를 통해 루이스가 만든 해적들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 관객이 보고 있는 셈이다. 루이스가 그토록 절실하게 기록하고 이야기로 남기고 싶었던 건, 전달하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루이스는 항해일지를 아무한테도 안 보여줬을 것 같아요. 이 항해일지는 어떻게 보면, 글쎄요, 일기장 같은 느낌이랄까요? 기억의 파편들이 정리되지 않은, 되게 날것의 기록들이요. 루이스가 '해적 이야기를 쓰자'라고 결심하게 된 거는, 이 항해일지를 날것으로 그대로 드러내는 것보다, 오히려 더 명확한 방식으로 자신들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게 이 사람들을 제대로 담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어떤 사실들은 설명이 필요하잖아요. 그 사실만 딱 놓고 봤을 때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니까요. 해적들을 조롱하고 미워하는 시대에, 누군가가 해적들의 이야기를 보았을 때 오해하지 않으려면, 그 사실들이 그냥 날것으로 담겨 있는 항해일지를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루이스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그 모습들을 고스란히, 오해의 소지 없이 담기 위해서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겠죠."
30대가 되는 것이 무척 싫었지만, 막상 30대가 되어 보니 또 다른 경험들이 몰려왔다. 마치 바다가 두려웠지만, 막상 바다에 닿으니 새롭게 펼쳐진 세계에서 많은 것들을 배우는 것처럼. 김이후는 어느새 스스로 더 성장하고 있음을 체감하며 자신의 커리어를 착실히 쌓는 배우가 되었다. '이후가 기대된다'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 '이후'로 예명을 지은 이 배우는, 지금도 '김이후 또 늘었다', '갈수록 성장한다' 같은 평가들이 제일 듣기 좋다고 한다. 루이스가 그랬듯이, 뮤지컬 <해적>을 통해 김이후가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도 비슷한 결이었다.
"제가 해적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게 굉장히 낭만적인 모험 이야기잖아요. 어릴 때 그런 모험 이야기들을 보면, 그냥 가슴이 벅차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보다 호기심과 흥미가 더 커지는 순간들이 오잖아요? 그래서 극장에서 <해적>을 보시는 분들도,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나가실 때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보다 흥미가 커지는 그런 경험을 하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 이후의 목표 “예전에는 배우가 연출과 작가께서 만들어 놓은 어떤 틀 안에서 뭔가를 해낸다고, 그 안에서 재창조하거나 재해석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최근에 창작극을 연달아서 많이 했는데, 창작 초연 극 같은 경우에는 배우의 책임이 훨씬 크더라고요. 같이 만들어 나가면서, 제가 해 나가야 할 부분들이 있다 보니까, ‘똑똑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경험도 많이 쌓아야 하고, 지식도 많아야 하고, 가치관과 시선도 훨씬 더 견고해지고 싶어요. 그런 시선과 의식이 생겼을 때, 신선하고 재밌고 독특한 캐릭터들이 생겨나는 데 어쩌면 내가 기여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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