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중 가장 싫은 주말, 이렇게 쓸쓸할 수가 [음악방송 작가의 선곡표, 문득 이 노래]
오랜 기간, 한국 대중가요를 선곡해 들려주는 라디오 음악방송 작가로 일했습니다. 지금도 음악은 잠든 서정성을 깨워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날에 맞춤한 음악과 사연을 통해 하루치의 서정을 깨워드리고 싶습니다. <편집자말>
[김혜원 기자]
열일을 하던 때는 몰랐다. 주말이 이렇게 한갓진 것인지를. 기쁨과 약간의 두려움이 공존해 있지만 온몸의 세포들이 그나마 늘어지며 재충전을 하는 날들인지를. 물론 전업작가로 살 결심을 하면서 종종 주말에도 데드라인에 맞춰 글을 써야 하긴 해도 지금 느끼는 주말의 감성은 이전과는 분명 결이 달라진 것이었다.
주말도 없이 일을 하던 그때, 일요일이면 생방송 원고를 쓰기 위해 늦잠조차 편히 자지 못하는 내 신세가 가끔은 한탄스러워 슬쩍 속이 상하기도 했다. 불평이라도 늘어놓을라치면 "당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 그렇게 싫으면 관두던가" 하는 남편의 날 선 대답이 등뒤에 꽂히곤 했다.
그때는 어쩌면 일주일 중에서 가장 싫었던 시간이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해 일요일까지 이어지는 주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주말이면 오후의 음악방송들이 거의 'BGM'으로 구성되곤 하지만 내가 한창 일할 때만 해도 일주일의 모든 방송이 거의 생방송이었기에 그럴 만도 했다. 주말도 없이 일하는 삶이 뭐 그리 좋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게 아무리 내가 선택한 사랑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 오늘은 일요일 9일 오후 시민들이 서울 반포한강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
ⓒ 연합뉴스 |
아무튼 방송을 그만둔 뒤부터 내게도 주말이 남들처럼 휴식을 누릴 수 있는 날이 된 게 너무 좋았다. 우선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깨고 싶은 때 깨 눈을 비비는 일부터 시작해, 주중에 보지 못했던 드라마나 영화를 몰아 볼 수 있는 건 특히나 최고의 행복이었다. 손수 내린 커피 향에 취해 한껏 느슨해진 내 몸의 세포들이 나른해지는 반응을 지그시 감상하는 건 덤이었을 테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눈을 뜨고 하늘 보니
짙은 회색 구름이 내 앞에 다가왔네
생각 없이 걷던 길옆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나를 바라보던 하얀 강아지 이유 없이 달아났네
나는 노란 풍선처럼 달아나고 싶었고
나는 작은 새처럼 날아가고 싶었네
작은 빗방울들이 아이들의 흥을 깨고
모이 쪼던 비둘기들 날아가 버렸네
달아났던 강아지 끙끙대며 집을 찾고
스며들던 어둠이 내 앞에 다가왔네
나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 한없이 걸었고
나는 빗속으로 들어가 마냥 걷고 있었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포근한 밤이 왔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예쁜 비가 왔네 / 들국화 '오후만 있던 일요일' 가사
주인공 김서형의 건조한 얼굴을 감싸듯 흘러나오는 노래. 들어보지 못했던 낯선 신인가수의 목소리에 얹혀 수채물감으로 풍경을 그리듯 담담하게 이어지는 노래. 내게는 들국화의 연주와 목소리로 더 익숙한 '오후만 있던 일요일'이었다.
이 곡은 그룹 '어떤 날'의 구성원이자 우리에게는 클래식 기타 연주자로 더 익숙한 이병우가 만든 곡이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어느 일요일 오후의 평화로운 풍경이 너무 맘에 와닿아 만든 곡이라 했던가. 이 아름다운 곡을 듣고 있던 들국화 멤버들이 그에게 청을 해 결국 1985년 발매된 명반 '들국화 1집'에 실리게 됐다던 바로 그 곡 말이다.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내 느낌은 이병우가 곡을 만든 이유와 정확하게 부합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잔존했지만 청춘이었던 그 시절, 세상의 많은 것들이 '추함' 보다는 '아름다움'에 자리해 있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으니. 그래서 용돈을 아껴모아 이 앨범을 샀었다. 턴 테이블에서 지지직 거릴 때까지 돌아갔던 '들국화' 1집의 수록곡 '오후만 있던 일요일'의 의미가 여유로움에서 쓸쓸함의 극치로 바뀐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금융기관에서 5년여 근무를 하고 돌아간 방송 스튜디오. 그렇게 원하고 다시 돌아오고 싶었던 자리였지만 역시나 그곳은 정글이었고, 삶의 현장이었고, 열악한 노동의 강도가 이어지는 곳이었다. 누구보다도 트렌드에 민감하면서도 정작 트렌드를 누릴 수는 없는 직업군이기도 했다. 수입은 이전과 비교해 3분의 1토막이 났고 주말도 없이 일하는 시간이 이어지니 이러다 지레 나가떨어질까 싶은 두려움이 간혹 몰려오기도 했다.
'어떻게 다시 돌아온 스튜디온데... 버텨야지'라는 생각을 제일 많이 했을 거다. 그러던 어느 하루 일요일로 기억된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이 선곡돼 나오는 것이다. 물론 제목 때문에 종종 일요일 선곡리스트를 채우던 곡이긴 했다.
하지만 유난히 해사했던 창밖의 봄햇살 때문이었을까. 현업이 아니면 근무자가 없던 텅 빈 방송 스튜디오를 조금씩 물들이는 피아노 반주는 이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게 들려왔다. 그리고 선율을 타고 무심히 허성욱의 목소리로 툭, 툭 던져지던 가사. 때문에 순간, 모든 것이 일시에 정지된 경험을 했다.
노래는 어느 시간, 어떤 장소에서 듣느냐에 따라 완벽하게 다른 감성을 입을 수 있단 걸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처음 들었을 때는 그렇게 나른하고도 아름답던 노래가 쓸쓸해도 이렇게 쓸쓸할 수 없는 노래로 탈바꿈 됐던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어떤 움직임도 할 수 없이 얼어붙은 채 밀폐된 스튜디오에 앉아 신청곡을 정리하고 있던 지친 20대 후반의 내가 거기 있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영혼이 어느 시공간에 갇혀 바싹 말라버린 것 같은 느낌에 방송을 어떻게 마쳤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드라마 <종이 달>의 음악감독도 이 노래의 깊숙한 어느 곳에 있던 그늘과 슬픔, 쓸쓸함을 읽은 것일 게다. 또한 주인공이 앞으로 걸어갈 길의 위태로움과 불안함을 예언처럼 노래가사로 그려내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노래가 가진 무한한 확장성은 드라마 화면을 채우며 화자를 대신한다. 이렇게 노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 누구보다 훌륭한 '스토리 텔러'가 되기도 한다.
<종이 달> OST가 데려온 아주 오래전 정경은 드라마의 그것보다 더 쓸쓸하다. 오후 음악방송의 건조한 쓸쓸함, 거기에 얼어붙어 있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게 만든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흘러 나는 이제 해빙기를 맞았고 '오후만 있는 일요일'을 나름대로 즐기는 방법도 터득했다. 드라마 속 인물의 감정과 내 감정을 섞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힘도 생겨났다. 하여 오늘 다시 듣는 '오후만 있던 일요일'은 가사처럼 예쁜 비를 내리게 하고 그 촉촉함으로 마음까지 적셔주는 노래다. 시간이 주는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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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혜원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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