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 떠오르던 '라이스보이 슬립스', 그리움의 맛

장혜령 2023. 4. 2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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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바라본 여성 이야기]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장혜령 기자]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컷
ⓒ 판씨네마㈜
 
맛은 추억과 공유된다. 어릴 적 먹었던 음식이 성인이 되어서도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는다. 행복했거나 슬펐던 때 먹었던 음식은 삶을 지배한다. 그 음식을 지금 마주해도 입맛 다시게 되는 이유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몸이 먼저 반응하는 본능적인 경험이다. 맛은 고로 기억이며, 이름, 이미지, 냄새만 맡아도 생생해진다.

영화를 보다가 신비한 경험을 해본 적 있는가? 필자는 영화 속 음식을 먹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바람에 종종 난감할 때가 많다. 이상한 습관은 사적인 의식이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음미하면서 영화를 곱씹고 문신처럼 뇌에 새겨 넣는 거다. 영화가 좋았다면 더욱 식사 후 심신이 안정되고 오랫동안 기억된다. 행여 좋지 못했더라고 음식으로나마 기분을 중화하려는 해장이다.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봤던 <라이스보이 슬립스>가 그랬다. 흰쌀밥에 겉절이 올려 한 숟가락 뜨고 싶었다. 된장찌개, 미역국, 계란말이, 김밥도 아른거렸다. 그야말로 물리게 먹어왔던 집밥이 왜 그리도 그리웠을까. 집 떠나온 타지에서 일주일 가까이 있었던 탓인지, 관람 내내 허기져 힘들었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내팽개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디아스포라, 뿌리를 찾아서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컷
ⓒ 판씨네마㈜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앤소니 심'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1990년대 캐나다 이민을 택한 모자의 의미 있는 시간을 훑는다. 감독은 1994년 캐나다로 이민 갔고, 동네의 유일한 동양인으로 관심과 차별의 대상으로 성장했다. 이는 유년 시절 큰 상처를 남겼고 해가 갈수록 백인과 동화되기 위해 끊임없이 정체성을 부정했다고 한다. 그럴수록 더욱 두드러졌던 한국적인 정서는 유전자에 깊게 새겨졌다. 너무 싫었지만 자석처럼 끌리는 것, 그때 들었던 마음을 영화로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고아원에서 자란 소영(최승윤)은 남편을 만나 아들 동현(도현 노엘 황)을 낳았다. 가진 것이 많이 없어도 행복을 전제로 미래를 꿈꾸었던 날, 남편과 사별하고 살길이 막막해진다. 혼인신고 전에 남편을 잃고 미혼모가 된 소영은 서류상 존재할 수 없는 아이를 안고 캐나다행을 결심한다. 아무도 없는 낯선 땅에서 새 출발 하기로 다짐한다.

노동자 계급이자 이민자, 동양 여성이었던 소영은 밤낮없이 일에 매달려 동현을 보살핀다. 하지만 싱글맘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공장에서의 성추행과 동현의 학교에서 당한 인종차별에 항거해야만 했다. 소영은 결코 씩씩함을 잃지 않으려 한다. 아들 앞에서 작아진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고 아빠 역할까지 두 배로 잘하고 싶었다.

음식에 깃든 애틋한 정서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컷
ⓒ 판씨네마㈜
 
최근 영화와 OTT에도 한인 디아스포라가 주목받고 있다. 전 세계의 이민 역사를 다룬 콘텐츠 중 유독 한국은 '음식'으로 관통하는 정체성이 두드러진다. <미나리>의 미나리, <파친코>의 김치,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쌀 등이 대표적이다.
쌀로 만든 '밥'은 한국인의 주식이자 소울푸드다. 한국인은 뭐니 뭐니 해도 밥심으로 버틴다. 먹기만 했나. 속담이나 말에도 쌀에 빗댄다. "밥 먹었어?"라는 말은 끼니를 해결했냐는 직관적인 물음이기도 하거니와 인사다.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대화를 끝내기도 하면서 다음을 기약하는 여지다. 속이 든든해야 어떤 일도 거뜬히 해낼 수 있다고 믿는 민족의 정서가 담겼으며 "밥이 보약이다"라는 말은 건강을 지키라는 걱정 어린 관심이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컷
ⓒ 판씨네마㈜
 
따뜻한 공깃밥 같은 작은 행복이 <라이스보이 슬립스>에 펼쳐진다. 먼 땅에서 가족이자 친구가 되어야만 했던 모자의 끈끈함, 다정함이 담겼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사라진 한국의 고려장 우화가 유독 가까이 다가왔다. 소영은 어린 동현에게 하필이면 <심청전>을 읽어주는데, 부모의 사랑과 자식의 효심이 교차되는 아이러니한 장면으로 잔상을 남긴다.

힘들고 지칠 때 유독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엄마는 그리움의 맛이다. 언제라도 뚝딱하고 집밥을 내어주는 엄마. 나를 키운 엄마의 푸짐한 밥상처럼 포만감 짙은 기분이 영화를 본 후에도 오래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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