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사 사장도 “암호문 같아”…‘깨알약관’ 언제쯤 쉬워질까

정진용 2023. 4. 23.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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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용어 빽빽…국민 90% “불편해”
매년 약관 이해도 평가하지만 효과 의문
정권 바뀌자 금융당국도 ‘조용’
“약관 개선 노력에 정부 적극 개입해야”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이 지난 2019년 보험개발원에서 열린 ‘소비자 눈높이에 맞춘 보험약관 마련을 위한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금융위원회
“보험사 사장을 지낸 저도 솔직히 제 보험약관을 끝까지 읽어보지 못했다. 비싼 보험을 만들기 위해 수 십개의 특약을 붙이고 내용을 다 담다 보니 약관은 두꺼운 암호문으로 변해버린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 2019년 2월26일 간담회 중)

전문 용어가 가득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깨알 보험 약관’ 문제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약관 이해도 평가를 실시하지만 낮은 점수를 받은 보험사에 시정하라고 권고할 권한은 없다. 해외에서는 글씨 크기 10포인트, 줄 간격 1포인트 이상 등 구체적 약관 기준을 마련하는 등 소비자 보호를 위한 다양한 조치를 시행한다.

보험약관은 보험금 지급범위 등 소비자가 알아야 할 권리와 의무를 명시한 문서다. 보험사고의 지급, 소비자 민원과 분쟁의 판단을 보험약관에 따라 결정하기 때문에 소비자 눈높이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 10명 중 9명은 약관이 어렵다고 토로한다. 지난 2019년 금융위가 실시한 금융소비자 보호에 대한 국민 인식조사에 따르면, 약관 및 상품설명서가 불편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88.6%에 달했다. 

제24차 보험약관등 이해도 평가결과 공시. 보험개발원

약관 이해도 평가서 ‘우수’ 받은 손보사 0곳

금융위 산하기관인 보험개발원이 생명·손해보험회사 상품을 대상으로 매년 두 차례 보험 약관 이해도 평가를 실시한다. 보험사가 보다 알기 쉽게 보험약관과 상품설명서를 만들도록 유도하기 위한 제도다. 

전문가와 일반인으로 구성된 평가단이 약관 상품설명서를 명확성, 평이성, 간결성, 소비자 친숙도 등 항목으로 평가한다. 평가 점수에 따라 등급은 △우수(80점대) △양호(70점대) △보통(60점대) △미흡(50점대)으로 구분한다.

회사별로 신계약건수 비율 등 선정계수가 가장 높은 상품 1개씩 평가한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10월 실시한 24회 약관평가에서는 생보사의 경우 제3보험, 손보사는 장기손해보험(상해 제외)이 선정됐다. 14개 손보사 중 우수 등급을 받은 곳은 전무했다. 평균 점수는 69.2점으로 ‘보통’ 수준이었다. 5대 손보사에 들어가는 현대해상, 삼성화재, 메리츠화재가 60점대를 받았다. 21개 생보사의 평균 점수는 77.1점으로 ‘양호’ 등급에 해당했다. 


목차 없고 글씨는 8포인트…이해도 평가 영향력에도 의문

전문가와 일반인 모두 법률용어 및 전문용어에 대한 설명이 없거나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연단위 복리로 할인’, ‘6개월 이상의 끝수는 1년으로 해 계산’ 등 계산과 관련한 조항에 대해서는 산출방법에 대한 예시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글자 크기가 10포인트 미만으로 작거나 장평·자간이 좁아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제는 여전했다. 8포인트 미만의 글씨가 들어간 보험사도 있었다. 페이지, 목차 누락으로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거나 중요부분을 강조하기 위한 밑줄과 하이라이트를 할 필요가 있다는 개선의견이 나왔다.

보험사들의 평가 점수는 눈에 띄게 개선되고 있지 않다. 같은 상품군을 평가한 때와 비교해보면 생보사는 73점(2018년 제16차)→71.6점(2020년 제20차)→77.1점(24차), 손보사는 67.4점(제16차)→66.7점(제20차)→69.2점(24차)로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다. 

약관 이해도 평가 결과 영향력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평가 결과가 실제 약관 개선으로 이어질 유인책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지난 2019년 금융감독원은 보험회사 경영실태평가(RAAS) 항목 중 소비자보호평가 부문에 약관 이해도 관련 평가항목을 신설하긴 했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일본 메이지 야스다생명 약관 예시.   보험개발원

대통령 지적에 부랴부랴 나섰지만…지금은 잠잠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 2018년 “보험 약관이 너무 깨알 같은 글씨에 양도 많아 소비자가 다 살펴볼 수 없다. 나중에 ‘숨어 있는 약관’ 때문에 피해를 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금융감독원과 금융위원회는 약관개선 TF를 꾸리고, 2019년 ‘보험약관순화위원회’를 설치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사용자 테스트를 3년마다 실시하는 등 문제점을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 금감원 보험약관순화위원회는 사실상 운영이 멈춘 상태다. 금감원 관계자는 “2020년 이후 활동이 뜸해진 건 사실”이라며 “올해는 한 번도 회의가 열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회의가 열린 날짜는 공개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어 “일단 운영 근거는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약관 개선 필요성이 있다고 하면 TF나 위원회 활동을 재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회에서도 논의가 중단된 지 오래다. 더불어민주당 홍성국 의원은 2020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은행, 보험사 등의 약관 가독성을 심사하고, 기준을 위반하면 시정명령 내릴 수 있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2년 넘게 정무위원회 계류 중이다.

다른 국가는 오래전부터 보험사에 약관 이해도 제고 노력을 강제하고 있다. 미국은 1978년부터 보험약관에 대해 가독성 테스트를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에서 최소 40~50점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뉴욕주의 경우 글씨 크기를 최소 10포인트 이상으로 하고 줄 간격도 1포인트 이상일 것을 요구하는 등 주별로 약관 가독성 향상을 위한 구체적 규정을 두고 있다. 일본은 상품인가 신청 시 가독성 관련 평가표(체크리스트 방식)를 작성해 제출하도록 한다. 또 보험회사는 메모나 만화 형태의 살명자료를 적극 활용한다.

이동건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정책팀 팀장은 “실손의료보험 가입자는 국민 40%에 달하는 등 국민 대다수가 보험에 가입해 있지만 정보 비대칭성이 매우 크다”면서 “특히 모호하고 불명확한 약관 내용이 문제다. 약관을 두고 분쟁이 발생했을 때, 소비자가 보험사를 이기기는 쉽지 않다”고 했다. 이어 “지금은 보험사 자율에 맡기고 있지만 약관 이해도를 높이는 작업에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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