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자식, 여전히 기다리는 93세 아버지

이혁진 2023. 4. 2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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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아무리 나이 먹어도 염려는 계속... 대화 가능할 때까지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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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진 기자]

 산책하는 아버지
ⓒ 이혁진
아버지는 보통 저녁을 일찍 먹고 9시쯤 취침한다. 그리고 오전 4시쯤 기침해 기도하는 것으로 아침을 맞는다. 오래된 습관인데 나도 이른 새벽을 즐기는 편이다. 내가 조간신문을 살피면서 연로한 아버지를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침 조반까지 조금 여유가 있어 우리 부자(父子)는 주로 건강과 지난 과거를 회고하며 시간을 보낸다. 나들이 계획이 있으면 아버지는 내게 특별히 말씀하신다. 나 또한 외출하거나 심부름할 때는 아버지께 상황을 자세히 말씀드린다.      

앞에 찻잔이 놓여야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쑤시는 등에 파스를 붙여 달라거나 어디 아프다고 하면 대화가 오간다. 사실 이런 '스킨십'이 대화보다 더 소중할지 모른다. 서로의 감정과 기분을 보다 진솔하게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눈과 귀가 어둡지만 자신의 뜻과 생각을 이야기할 때가 흐뭇하고 행복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아버지는 내게 뜬금없이 묻는다.     

아버지 : "아범! 어제 몇 시에 왔어?"
필자 : "네, 어제 조금 늦었습니다."
아버지 : "9시 반까지 기다렸는데..."
필자 : " ..." 

코로나 때문에 3년 만에 열리는 동창 녀석들 저녁 모임에 참석하기에 기다리지 말고 주무시라 했는데 내심 무척 기다리신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빨리 귀가해 아버지를 볼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사실 아버지의 이런 채근은 약 50년 전 젊은 시절에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아무리 나이 들어도 자식은 자식인가 보다. 칠순 된 아들을 기다렸다는 말에 새삼 뭉클하면서도 왠지 아버지 얼굴이 쓸쓸하고 측은해 보였다.      

내가 20대 때 빨리 귀가한 적이 별로 없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밤 늦게 쏘다니다 꾸지람도 많이 들었다. 그때는 부모님이 내 신발을 확인하거나 고양이처럼 야금야금 귀가하는 내 인기척을 듣고서야 잠을 청했을 것이다. 부모님은 외출한 나를 노심초사 기다렸을 것을 것이다.      

이제는 반대로 내가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가 잘 주무시고 잘 드시면서 건강을 바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요새는 노쇠하고 기력이 떨어진 아버지가 경로당만 무사히 다녀오셔도 안심이다.      

당신께서는 일주일에 세 번 혼자 지팡이에 의지해 동네 경로당을 다녀오신다. 그렇다고 매번 동행하거나 말릴 수도 없어 쉬엄쉬엄 다녀오시라 하지만 귀가할 때까지 나는 조마조마하다. 그간 여러 번 크고 작은 낙상을 겪기도 했다.      

93세 아버지는 85세 때까지도 경로당을 출입하지 않았다. 그만큼 건강하고 대외적으로 바쁘게 활동했다. 아버지는 모두에게 따뜻이 배려하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셨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대화할 사람들이 작고하거나 주변에서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외로움을 함께 달래줄 부부와의 소중한 인연마저 일찍이 끊겼다. 어머니가 31년 전에 먼저 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얼마 전에 꿈속에서 어머니와 오랜만에 재회했다며 흥분하셨다.      

아버지는 보청기를 했지만 귀가 여전히 어둡다. 자연히 말수도 줄었다. 주로 듣는 편이다. 대신에 나는 말이 많아졌다. 나는 가끔 할 말만 골라하는 아버지가 부럽다. '아버지가 조금만 더 귀가 밝다면 재미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의 가장 편한 말동무로 남았다. 대화가 말로만 이뤄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아버지는 누구보다 자식과의 대화에 집중하신다. 이때 표정도 밝고 즐겁다.      

나는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일상에 감사하고 있다. 아버지의 새벽 기도는 '기적'이라 생각한다. 기도는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징표이고 자식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신호이다.      

고령으로 몸은 불편하지만 아직은 온전한 정신으로 자식 걱정하는 아버지가 계시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가 새벽마다 아버지와 대화를 기다리는 이유다.      

언젠가 호암미술관에서 부모님의 깊은 은혜에 대해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 '불설부모은중경(佛說父母恩重經)' 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중에  자식을 염려하는 은혜가 오늘따라 심금을 울린다.     

"죽어서 헤어짐도 참아가기 어렵지만 살아서 헤어짐은 아프고 서러워라. 자식이 집을 나가 먼 길을 떠나가니 어머니의 모든 마음 타향 밖에 나가 있네. 밤낮으로 그 마음은 아이들을 따라가고 눈물 줄기 천 줄기인가 만 줄기인가. 원숭이 달을 보고 새끼 생각 울부짖듯 염려하는 생각으로 간장이 다 끊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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