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테라스로 입소문, 영화 덕후들의 성지 된 '이곳'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극장 산업이 위축됐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진 요즈음, 국내에 몇 안 되는 독립예술영화 전용관들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침체기에서도 나름의 자구책,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예술영화 전용관들을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이선필, 이정민 기자]
▲ 박혜진 아트나인 팀장 박혜진 아트나인 팀장이 18일 오후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 이정민 |
영화 덕후(전문가 버금가게 흥미와 열정을 품고 있는 팬덤을 뜻하는 신조어) 양성소의 양대산맥. 서울 사당동의 한 빌딩에 자리한 예술영화전용관 아트나인을 수식하는 문장이다. 서울 홍익대학교 부근의 상상마당 시네마와 함께 아트나인은 영화를 '특별히' 애정하는 관객들에겐 우물가와 같은 곳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영화관주의'를 표방하며 창작자와 관객 모두 만족시키는 다채로운 기획 행사들의 원조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KT&G 사업 재정비 등으로 내홍을 겪기 전까지 상상마당이 '덕후마당'으로 불렸다면, 관객들 사이에서 아트나인은 '덕트나인'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파스타 등 브런치 메뉴가 특화된 잇나인과 LED 4K 상영시설을 갖춘 테라스 상영관은 이곳의 상징이기도 하다. 지난 1월 19일 개관 10주년을 맞이한 아트나인의 진짜 속살은 어떨까. 18일 해당 공간의 프로그램을 책임지는 박혜진 팀장을 만났다.
눈치 보지 않는 기획
그 영화관주의의 정체부터 물었다. 아트나인의 홍보문구, 영화 상영 때에도 매번 들을 수 있는 이 단어를 두고 박혜진 팀장은 "영화를 만든 사람의 의도에 가장 가깝게 환경을 구축하고, 관객에게 오롯이 영화를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아트나인은 영화 상영 전후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관련 행사도 많이 해왔다. 영화를 천천히 오래 즐길 수 있는 공간인 건데 영화가 끝나고 엔딩곡이 나오잖나. 상영관을 나와서도 그 영화 음악을 틀어놓곤 했다. 영화의 여운을 이 공간에서 오롯이 느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아무래도 대표님이 멀티플렉스 운영 경험이 있다보니 슈퍼마켓처럼 여러 영화를 진열해놓고 관객과 극장 안에서 관계성을 주고 받는 걸 추구하셨던 것 같다."
개관 당시 아트나인은 멀티플렉스 못지 않은 상영시스템, 특히 사운드에 신경을 썼던 걸로 유명하다. EV사의 P시리즈 파워엠프를 단 후 공간에 맞게 사운드 시스템을 정비해왔다. 예술영화관 중 최초로 4K 영사기를 도입하기도 했다. 물론 기술의 급변과 유지 보수 비용 문제 등으로 국내 상영관들 수준이 평준화되었지만, 아트나인의 이런 특색은 독립예술영화인들에게 동기부여가 되기 충분했다.
▲ 박혜진 아트나인 팀장 박혜진 아트나인 팀장이 18일 오후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 이정민 |
0관(92석)과 9관(58석), 총 2개관의 200석이 안 되는 규모임에도 아트나인은 코로나19 팬데믹 직전까지 국내 예술영화전용관 매출액 기준 상위권을 항상 유지했다.
10점 만점을 향한 9의 열정, 완벽으로 가려는 노력을 뜻하는 '나인'이라는 이름처럼 그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왔다고 볼 수 있다. 관객의 사랑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게 지난 1월 진행된 10주년 '특별 감사 상영회'였는데 극장 상황이 심하게 어렵다는 와중에도 당시 상영회는 2022년 1월 대비 약 두 배 관객이 몰릴 정도로 성황이었다는 후문이다.
"감사 상영회를 조조 가격에 맞춰서 7천 원에 진행했는데 관객분들이 많아 찾아주셨다. 그걸 보면서 지금 일반 극장이 외면받는 게 분명 가격 인상도 원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관객분들은 극장을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니라 망설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럴수록 극장은 프로그램과 기획을 잘 만들어서 적극 권해야 한다고 본다. 지난 3월 일본 영화 기획전 때도 많이 오셨거든."
기획전도 그렇지만 아트나인은 그간 세 편의 영화를 밤새 볼 수 있는 올나잇 상영회, 카페테리아를 활용해 각종 음식과 차를 영화 관련 굿즈로 제공하는 기획, 테라스 상영회 등을 고루 진행하는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유명하다. 캐나다 출신의 신예 자비에 돌란 감독도 발굴해 최초로 국내에 소개하는 등 국내외 신진 영화인 발굴에도 힘쓰고 있다. 프로그래밍 개발, 관객 개발 등 극장 전략을 보다 자세히 물어볼 필요가 있었다.
"눈치를 안 보는 느낌이랄까. 어떤 영화를 절대 틀면 안 된다는 제한 없이 지금의 관객분들이 보고 싶어 하는 걸 찾으려 한다. 최근 개봉작이 아니더라도 기획 상영을 통해 소개해왔고, 상업영화를 틀기도 했다. 올나잇 상영은 코로나19 팬데믹 땐 못하다가 지난해 12월 31일에 재개했는데 전석 매진이었다. 아무래도 메가박스라는 멀티플렉스가 들어선 건물이라 심야까지 열려있다는 게 장점이지. 예술영화관 중에선 드물게 밤 10시, 11시 심야 상영도 할 수 있었다.
야외상영은 4K LED라 낮에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날씨가 허락하는 한 일주일에 두 번씩 5년째 진행해왔는데 거의 전석 매진이다. 보면 아트나인을 처음 오시는 분들 비중이 높더라. 그만큼 우리 극장을 알리는 좋은 기회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이 야외상영 덕이 크다.
▲ 아트나인에서 매월 발간하는 무가지 <페이퍼 나인>. 직원들이 한땀한땀 손수 글도 쓰고, 퀴즈도 만든다. |
ⓒ 이선필 |
"수입 및 배급 경험, 극장 운영에 도움돼"
평일 오전이면 텅텅 비는 등 좌석점유율이 낮을 수밖에 없는 멀티플렉스 극장과 달리 예술영화관은 시간대별로 관객층이 분명하게 나뉘어 영화를 찾는 특징이 있다. 아트나인 또한 평일 오전 시간엔 20대 미만이, 점심시간 때는 중장년층이, 저녁 시간 때는 직장인과 20~40대 관객이 주로 찾고 있었다. 박혜진 팀장은 "관객들이 고르게 분포돼 있고, 주말엔 이분들이 다 같이 찾다 보니 특정 관객층이 많다고 하기 어렵다"며 설명을 이었다.
"상영 영화에 따라 중고등학생도 많이 온다.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은 특히나 학생들이 많이 찾았다. 프로그래머 입장에서 관객 입맛에 맞게 준비하는 게 그래서 힘들다. 관객 구미에 맞는 영화뿐만 아니라 반 발짝 앞서서 제시하는 역할도 해야 하는데 그 부분이 딜레마긴 하다. 다른 예술영화관도 열심히 하시겠지만, 팬데믹 이후 극장만의 특징 있는 프로그램이 매우 중요해졌다.
아트나인은 엣나인이라는 수입배급사도 같이 운영하고 있다 보니까 국내에 수입이 안 된 작품을 구해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 영화도 그렇게 가져왔고,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 작품도 틀 수 있었다. 예전에 정성일 평론가에게 미개봉작이지만 꼭 봐야 할 영화들 리스트를 부탁드린 적 있다. '마땅히 당신께서 보아야 했으나 아직도 당신께서 보지 못한 영화'라는 기획전을 함께 진행했다. 네 편을 선정해 우리가 직접 자막을 만들어 관객 토크를 했다. 물론 비용은 많이 들었는데 이런 게 새로운 관객 개발인 셈이지."
오즈 야스지로 기획전, 찰리 채플린 기획전, 에릭 로메르 기획전, 장국영 기획전 등 박혜진 팀장은 그간 엣나인에서 판권을 사거나 상영권을 산 뒤 소개한 사례도 알려줬다. 박혜진 팀장은 "장국영을 기성 세대의 배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20대 팬들이 엄청 많아졌다"며 "사망 뒤 팬이 된 젊은 관객분들이 예전 영화들을 보고 싶어 해서 묶어서 기획했는데 최신 개봉작보다 훨씬 많은 관객이 들었다"고 귀띔했다.
홍보 전략 면에서도 아트나인은 일찌감치 인스타그램 등 SNS를 적극 활용 중이다. CGV보다 팔로워 수가 약 2배 많은 4.8만 명이다. 메가박스 예매시스템을 이용하고 있어서 따로 극장 홈페이지를 만드는 대신 SNS로 관객과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었다. 영화 <벌새>의 경우 아트나인을 중심으로 한 팬덤 '벌새단'이 꾸려져 흥행에 큰 힘이 됐다.
▲ 박혜진 아트나인 팀장 박혜진 아트나인 팀장이 18일 오후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 이정민 |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의 전략
박혜진 팀장은 팬데믹 이후 제기되고 있는 극장 위기론을 실감한다면서도 제법 냉정한 분석을 내놓았다. "그땐 코로나19라는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엔데믹임에도 관객분들이 극장에 잘 안 오시는 건 분명 관람 패턴의 변화 때문"이라며 그는 운을 뗐다.
"예전엔 외화 하나를 개봉하면 기본 5천에서 1만 명은 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어려워졌다. 예술영화관 절반 이상이 개봉 영화를 틀지 않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개봉작이 아닌 관객분들이 극장에서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튼다는 것이다. OTT에서도 물론 과거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어떤 영화만큼은 오롯이 극장에서 봐야 할 게 있다. 그런 영화를 찾는 전략으로 가는 것 같다. 그래서 관객 개발이 중요해졌다.
예전에 엣나인, 아트나인의 목표 중 하나가 국내 신인 감독, 해외 신인 감독을 매년 꾸준히 발굴해서 레이블을 만들자는 거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자비에 돌란처럼 신인 발굴을 마음껏 할 수 없긴 하다. 작년에 <가가린> 정도가 우리가 발굴한 신인 감독 데뷔작이었다. 더 공격적으로 하고 싶은데 어려워졌다. 그래서 영화진흥위원회 지원금 증액이나 서울시 등 지자체 지원이 절실하다. 특히 하드웨어, 시설을 개보수하는 데 쓸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나름 매출 상위권이라는 아트나인도 펜데믹 이후 여전히 평년의 절반 정도밖에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영진위 통계 기준). 70% 이상 매출을 회복한 주요 멀티플렉스 극장을 떠올려 볼 때 암담한 현실이다. 박혜진 팀장은 "보다 수월하게 예술영화- 독립영화 정보를 접할 수 있는 통합 플랫폼이 필요하다"며 일종의 독립예술영화 포털을 제안했다.
"지금은 예술영화관도 독립영화인도 각자도생하는 상황인데 관련 정보를 한 곳에서 볼 수 있고, 커뮤니티 기능도 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었으면 좋겠다. 상영작 리뷰도 볼 수 있고, 서로 교류도 할 수 있는 곳 말이다. 젊은 관객이야 어떻게 해서든 정보를 찾아서 오시는데 정보 소외층은 이런 작은 영화 정보를 알기 어렵거든. 그분들에게 우리 영화들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우리 나름대로 <페이퍼 나인>이라는 오프라인 잡지를 내고 있다. 4페이지 분량의 무가지인데 매월 발간한다. 영화 퀴즈도 내고 경품도 있다. 이걸 2천부씩 찍어서 서울 시내 카페에 보내곤 한다.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이런 역할을 함께 해줄 수 있는 플랫폼이 탄생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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