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민의 눈으로 바라본 대한민국 현대사
[양형석 기자]
지난 1994년에 개봉했던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톰 행크스 주연의 <포레스트 검프>는 6억77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고 아카데미 6개 부문을 수상했을 정도로 작품성도 인정 받은 영화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포레스트 검프>는 경계선 지능을 가졌지만 가슴 따뜻한 포레스트 검프의 성장 드라마이자 적절한 블랙코미디와 현실풍자까지 곁들인 영화로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포레스트 검프>를 보는 또 다른 재미는 바로 포레스트가 미국의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에 개입하거나 역사 속 인물을 만나면서 미국 역사에 작게나마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실제로 <포레스트 검프>에는 '로큰롤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의 존 레논,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 F.케네디, 린든 B.존슨, 리처드 딕슨 등이 포레스트와 인연을 맺는다(물론 해당인물들은 모두 고인이 됐기 때문에 이 장면들은 대역배우를 썼거나 합성으로 대체했다).
▲ <효자동 이발사>는 2004년 어린이날에 개봉해 전국 197만 관객을 동원했다. |
ⓒ 영화사청어람(주) |
1960~1970년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한국영화들
대한민국은 그동안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겪어왔다.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초대 대통령이 하야하고 강제로 정권을 잡은 군부가 20년 가까운 장기집권을 이어가다가 충신이라 믿었던 이에게 살해 당하는 등 역사적으로 대단히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당연히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도 많이 제작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를 다룬 영화 중에서 관객들에게 가장 뜨거운 지지를 받았던 영화는 단연 2014년에 개봉했던 윤제균 감독, 황정민, 김윤진 주연의 <국제시장>이었다. <국제시장>은 6.25 전쟁을 시작으로 파독광부, 베트남 전쟁 등 한국역사의 격변기를 덕수(황정민 분)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며 산업화 세대를 조명했다. <국제시장>은 같은 시대를 살아온 중·장년층 관객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얻으며 1420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이문열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1992년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자유당 독재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1959년을 시작으로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시대를 한 초등학교 학급에 투영한 작품이다. 5학년이지만 학교 전체를 주름 잡는 엄석대를 연기한 홍경인의 눈부신 열연과 얼마 전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카지노>를 마친 최민식의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의 연기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를 잇는 유하 감독의 '거리 3부작'(또는 '폭력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한 <강남 1970>은 어린 시절 친형제처럼 자란 두 사람이 강남 개발의 이권싸움에 끼어 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김래원이 <해바라기> 이후 9년 만에 선택한 액션 누아르로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정작 해외판매를 통해 영화의 손익분기점을 넘기게 해준 일등공신은 '한류스타' 이민호였다.
그렇다고 1960, 1970년대가 언제나 심각하고 암울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손예진의 리즈 시절을 볼 수 있는 영화로도 유명한 곽재용 감독의 <클래식>은 세대를 이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주제로 한 멜로 영화다. 손예진이 모녀 지간인 1960년대의 주희와 2000년대의 지혜를 모두 연기한 가운데 '청춘스타' 조인성을 제치고 실질적인 남자주인공으로 활약한 조승우의 애절한 멜로연기가 돋보인 영화였다.
▲ <효자동 이발사>는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청와대 이발사가 된 소시민의 눈으로 바라본 영화다. |
ⓒ 영화사청어람(주) |
2000년 <반칙왕>과 <공동경비구역JSA>를 통해 주연배우로 자리 잡은 송강호는 2003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서 열연을 펼치며 최민식,설경구와 함께 '충무로 3대천왕'으로 군림했다. 그런 송강호가 <살인의 추억> 이후 차기작으로 선택한 영화가 바로 청와대에서 대통령 전용 이발사로 활동하며 격변의 시대를 온 몸으로 경험하는 소시민 성한모 역을 맡은 <효자동이발사>였다.
<효자동 이발사>에서는 5.16 군사 쿠테타와 북한 124 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 유신개헌, 10.26 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성한모의 시선을 통해 다뤄진다. 하지만 <효자동 이발사>가 마냥 진지하고 심각하게 흘러가는 영화일 것이라 미리 겁 먹을 필요는 없다. <효자동 이발사>는 송강호를 비롯한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를 바탕으로 영화 곳곳마다 관객들이 가볍게 웃고 지나갈 수 있는 장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영화 개봉 후 몇 년이 지나 보수정권이 들어서자 보수 정치인들은 <효자동 이발사>를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봉준호 감독의 <괴물> 등과 함께 '좌파영화'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극악무도한 독재자가 아닌 차분하고 인간적인 지도자로 묘사된다. 심지어 성한모의 아들 낙안(이재응 분)이 박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을 밀쳤을 때도 "애들끼리 놀다 싸울 수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일부 관객들은 성한모의 아들 낙안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실제 한국의 민주주의가 미국에 의해 갑자기 도입된 것처럼 낙안도 미혼이던 엄마, 아빠의 불장난(?)으로 예기치 않게 태어났다. 게다가 군부독재 체제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것처럼 낙안도 고문후유증으로 장애를 갖게 된다(물론 낙안의 다리가 기적적으로 낫게 되는 1980년에도 대한민국에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찾아오지 않았다).
<효자동 이발사>의 각본과 연출을 모두 맡은 임찬상 감독은 영화 아카데미 13기 출신으로 2001년 설경구와 전도연 주연의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연출부를 맡았다가 2004년 <효자동 이발사>로 데뷔했다. <효자동 이발사> 이후 10년 동안 차기작이 없었던 임찬상 감독은 2014년 조정석, 신민아 주연의 리메이크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로 214만 관객을 동원했지만 다시 9년째 차기작 소식을 들려주지 않고 있다.
▲ 문소리는 <효자동 이발사>에서 성한모의 아내이자 성낙안의 엄마 김민자 역을 맡았다. |
ⓒ 영화사청어람(주) |
지난 14일에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퀸메이커>에서 열연을 펼친 문소리는 <효자동 이발사>에서 성한모의 아내이자 성낙안의 어머니를 연기했다. 하지만 <오아시스>와 <바람난 가족>을 통해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문소리는 <효자동 이발사>에서 그녀의 인지도에 비해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았다. <효자동 이발사>에서 모녀 사이로 출연한 문소리와 이재응은 이듬 해 개봉한 <사랑해, 말순씨>에서도 다시 한 번 모녀연기를 선보였다.
배우 조영진이 연기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인자한 인물로 표현되면서 <효자동 이발사>의 악역은 차지철 전 청와대 경호실장을 모델로 한 경호실장이 도맡아 했다. 성한모를 청와대 이발사로 발탁한 경호실장은 상당히 권력지향적이고 대통령에 대한 과잉충성으로 가볍게 넘어갈 법한 작은 일에도 부하직원이나 성한모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경호실장 역은 <파이란>을 비롯한 여러 영화에서 발군의 악역 연기를 선보였던 배우 손병호가 맡았다.
중후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윤주상 배우가 연기한 쌀가게 최씨는 영화 초반부터 열렬한 자유당 지지자로 등장해 동네 사람들에게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투표할 것을 '강요'한다. 최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후에도 공화당의 열혈 지지자가 된다. 최씨는 내심 정치에 입문할 뜻을 가지고 청와대를 들락거리는 성한모에게 잘 보이려 하지만 '마루구스병 간첩단 사건'으로 잡혀가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무고하게 사형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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