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 로드뷰로 가세요"…"신흥거지" 청년 모인 거지방
"친구들끼리 돌아가면서 밥 사는데 조만간 제 차례거든요...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까요?" -"절교요" -"잠적 추천" "스타벅스에서 자몽허니블랙티 5300원" -"스벅? 배가 불렀군요" -"그냥 회사가서 물 마시세요" "저를 운반해준 어르신께 감사의 인사로 3800원 드렸습니다" -"택시 타셨군요" -"두 발로 걸으세요"
스스로 '거지'를 자처하는 20~30대 청년층이 늘고 있다. 적게는 3명, 많게는 1000여명이 한곳에 모여 자신의 지출 내역을 공유하고 소비 전 허락을 구하는 '거지방'이 유행하고 있다.
22일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는 "지출을 기록하는 슬픈 거지들의 안락한 채팅방", "진짜 거지들만 들어오세요", "거지 그 잡채(자체)끼리 절약놀이", "원조거지를 위협하는 신흥거지가 나타났다" 등의 소개를 앞세운 거지방 수백 개가 운영되고 있다.
참여자들은 이달의 목표 지출금액 등을 넣어 닉네임을 설정한 뒤 활동을 시작한다. 자신의 지출 내역, 예상 소비 품목을 공개하고 평가받는 식이다.
거지방에서 한 참여자가 "영화 티켓값이 비싸 부담"이란 글을 올리자 다른 참여자들은 "헌혈하면 티켓을 준다"고 조언했다. 또다른 참여자가 "샐러드가 먹고 싶다"고 하자 "다이소에서 채소 키트 사서 재배해서 먹는 것을 추천한다"는 답이 나왔다.
거지방에서 이같은 '절약 노하우'만 공유되는 것은 아니다. '소비 허락'을 구하는 글에 재치와 풍자가 담긴 답들이 경쟁하듯 쏟아졌다.
남녀 900여명이 모인 한 거지방에 "친구 결혼식 축의금 얼마나 해야 되나요? 고등학교 친구입니다"라는 글이 올라오자 "당신은 이제부터 검정고시 출신", "안가고 5", "봉투는 공짜니 이름만 써서 내는 척하세요", "5만원 내고 식권 2개 챙겨 밥 먹고 답례품까지 받아오세요"라는 답이 달렸다.
"코인 노래방 - 2000원"이라는 글엔 "정말 화가 나네요", "노래방 가지 말고 밖에서 부르세요", "화장실에서 부르면 에코 기능까지 가능", "유튜브에서 MR 찾아 틀면 그곳이 노래방" 등의 의견이 이어졌다.
상당수 답변은 정보보단 웃음을 준다. "3500원짜리 녹차라떼를 마시고 싶다"고 하자 "한강 물을 마시라"고 하거나 "여름휴가 때 갈 여행지를 추천해달라"는 글에 "로드뷰로 만족하라"는 답을 다는 식이다. 조개구이를 곁들인 술상 사진을 올린 뒤 "욕 한 사발 부탁드린다"는 글엔 "욕할 가치도 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불경기 속 거지방서 동병상련 느끼는 MZ"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고물가로 다들 힘들다고 하지만 소셜미디어(SNS)에 남루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며 "SNS로 소외감을 느끼면서도 이를 멀리할 수 없는 젊은 세대들이 거지방을 통해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모두가 힘들다는 위로와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주알고주알 넋두리식으로 늘어놓기 시작하면 서로가 부담스러울 텐데 젊은 세대들은 약간은 장난스럽게 접근하는 방식으로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다만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거지방을 통해 위화감이나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면 바람직한 소통 방식은 아닐 것"이라며 "가볍게 접근하더라도 오가는 말들에 진정성이 있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정혜정 기자 jeong.hye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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