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프로스트 60주기, 미국인은 왜 그를 존경할까

2023. 4. 2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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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은 길' 시인 프로스트 추모한 케네디의 기념비적 연설
"권력을 계도하며 통제하는 정신도 권력 못지않게 중요"

명연설문집을 즐겨 읽는다. 대통령 취임사, 역사적인 연설 등이다. 명연설문을 읽으면 뿌옇던 머리가 비 갠 하늘처럼 맑아진다. 말 그대로, 제색(霽色)이다. 추도사도 명연설문에 포함된다. 추도사는 사람을 떠나보내면서 그 사람의 생애를 압축하는 글이다.

“삶은 꿈이고, 죽음은 실존이다.”

쇼펜하우어의 어록이다. 실존의 무대에서 지나온 꿈을 문장으로 풀어내는 것이 추도사다. 추도사는 고인의 삶을 가장 잘 아는 사람, 고인이 생전에 추구했던 가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쓰는 것이다.

1974년에 발행된 로버트 프로스트 기념우표. 사진=위키피디아

내가 틈날 때마다 읽고 종종 인용하는 추도사가 한 편 있다. 60년 전인 1963년 10월 26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 앰허스트대학에서 있은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의 추모식에서 읽은 추도사다.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시인이다.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는 시인이 등장해 새 대통령을 위한 시를 낭송하는 전통이 있다. 1961년 1월 20일, 나이 80대의 시인은 백발을 휘날리며 젊은 40대 대통령의 앞날을 축하하는 축시를 낭송했다.

“우리가 이 땅의 우리이기 전, 이 땅은 우리의 땅···”

프로스트가 88세로 세상을 떠난 것은 1963년 1월. 추도식은 같은 해 10월 고인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앰허스트 대학에서 열렸다. 앰허스트 대학은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인문대학으로, 인문대학 세계 랭킹 상위에 오르내리는 학교다.

1963년 10월 26일 미국 앰허스트대학 강당에서 추모사를 읽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사진=앰허스트대학 홈페이지 캡처.png

케네디는 “한 나라는 그 나라가 배출하는 인물만이 아니라, 그 나라가 기리는 인물, 기억하는 인물을 보면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알 수 있다”면서 추도사를 읽어 내려간다.

“···한 나라가 위대해지려면 권력을 창조하는 사람들의 기여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그에 못지않게 필요합니다 ···권력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계도하며 통제하는 정신도 권력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권력이 인간을 오만으로 몰고 갈 때 시는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줍니다. 권력이 인간의 관심 영역을 좁힐 때 시는 인간 존재의 풍요와 다양성을 일깨워 줍니다. 권력이 부패할 때 시는 그것을 정화해 줍니다.···

예술가의 자리를 온전히 인정해주는 것보다 우리나라와 우리 문명의 미래에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예술이 우리 문화의 뿌리에 영양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사회는 예술가가 자신의 비전이 이끄는 대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예술이 선전의 한 형태가 아니라 진리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민주사회에서는 작가, 작곡가, 화가의 가장 큰 의무는 결과에 관계없이 끝까지 자신에게 진실한 것입니다. 예술가는 진실에 대한 자신의 비전에 충실함으로써 나라에 가장 큰 봉사를 합니다. 예술의 임무를 경멸하는 나라는 프로스트의 시에 나오는 고용된 사람의 운명을 맞이합니다. ‘자랑스럽게 회고할 것도 없고,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볼 수도 없는 운명’을 말입니다. ···

나는 기업이나 정치적 업적에 보답하듯이 예술적 업적에도 보답하는 미국을 기대합니다. 예술의 수준을 꾸준히 높여가고, 국민 모두를 위하여 문화적 기회를 꾸준히 확대하는 미국을 기대합니다. 비단 힘 때문만이 아니라 그 문명 때문에 전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미국을 기대합니다···

프로스트의 생애와 작품 때문에, 이 대학의 역사와 업적 때문에, 우리는 이 지구를 더 힘차게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추모 연설은 정치가가 예술의 가치를 강조한 기념비적 연설로 평가받는다. 60년이 흐른 지금 다시 음미해도 더 보태거나 뺄 말이 없다. 앰허스트대학 안에는 ‘JFK 대통령 도서관·박물관’과 ‘프로스트 도서관’이 있다.

워싱턴 DC의 포토맥강 강가에 있는 국립예술공연장이 케네디센터다. 워싱턴을 처음 찾는 사람들은 반드시 들르는 명소다.

케네디센터는 1958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의회를 통과한 ‘국립문화센터 건립안’이 그 출발점이다. 연방정부가 건립 비용을 보조한 첫 사례다. 건립 비용은 5년에 걸친 모금 운동으로 마련했다. 모금 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던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이 발생한다. 프로스트 추모 연설을 한 지 한 달 만이다. 이후 국립문화센터는 케네디센터로 이름이 바뀐다.

케네디센터는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존슨 대통령이 1964년 겨울 첫 삽을 떴다. 그리고 1971년 가을 문을 열었다. 현직 대통령 JFK가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다면 이 예술공연장은 ‘국립문화센터’라는 원래의 이름대로 세워졌으리라. 케네디센터 외벽에는 ‘정치가가 예술의 가치를 강조한 기념비적인 연설’의 일부가 새겨졌다.

케네디센터 안에 전시중인 JFK 두상. 조각가 로버트 벅스의 1971년 작품. 사진=위키피디아.jpg

케네디센터 안에는 공연장이 세 개다. 콘서트홀, 오페라하우스, 아이젠하워극장. 오페라하우스 출입구 맞은편 창가 쪽에는 JFK의 두상이 놓여 있다. 조각가 로버트 벅스의 1971년 작품이다.

왜 미국인은 프로스트를 존경할까.

미국인이 존경하는 시인 두 사람을 꼽으라면 월터 휘트먼과 로버트 프로스트다. 미국 학생들은 휘트먼과 프로스트를 교과서에서 배운다. 한국인이 프로스트를 알게 된 것은 ‘가지 않은 길’이 교과서에 실려서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가지 않은 길’을 생각할 때가 있다. 젊은 날, 그때 내가 이 길이 아닌 저 길을 선택했더라면 ….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그는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로 간다. 버몬트주와 뉴햄프셔주에서 농부로 일한다. 주경야독(晝耕夜讀)과 청경우독(晴耕雨讀)의 생활을 이어간다.

농부를 그만두고 교사, 기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 서른여덟이 되던 1912년 그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한다. 대서양 건너 영국으로 간다. 영국에서 E 토마스, R 브룩 등 시인들과 교유한다. 이들의 추천을 받아 첫 시집 ‘소년의 의지’가 런던에서 출간된다. 1915년 미국으로 귀국한 그는 전업 시인이 된다.

‘가지 않은 길’ 외에 널리 알려진 시로는 ‘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가 있다. 이 시에서는 뉴잉글랜드의 농촌 풍경이 흑백사진처럼 펼쳐진다. 사과따기, 돌담쌓기, 울타리, 시골길···.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울림이 크고 여운이 길다.

1910년대의 로버트 프로스트. 사진=위키피디아.jpg

프로스트는 1923년 시집 ‘뉴햄프셔’를 발표한다. 이 시집으로 그는 생애 첫 퓰리처상 수상이라는 영광을 안는다. 이후 잇따라 세 번 퓰리처상 수상자가 된다. 1960년에는 의회골드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인은 여전히 프로스트를 숭모한다.

JFK의 프로스트 추도사를 떠올린 것은 얼마 전 아나운서 김동건의 방송 데뷔 60주년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다. 그가 아나운서클럽 회장 시절의 일이다. 아나운서 출신 8명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후배 아나운서가 “축하 난을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자 그는 거절했다고 한다. “그게 축하할 일이냐? 국회의원 하다 아나운서가 됐으면 축하할 일이지만.”

김동건은 60년 방송 생활하는 동안 권력의 숱한 유혹을 뿌리쳤다. 새로운 권력은 언제나 그를 간판으로 내세우려 했지만, 그는 아나운서직(職)을 지켰다.

그는 ‘가요무대’ 사회를 30년 넘게 진행 중이다. 2003년, 18년 진행하던 프로그램에서 권력에 의해 강제 하차당했다. 그리고 2010년 7년 만에 복귀했다. 시청자들이 그를 무대로 불러낸 것이다.

“(아나운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시청자들이 묻고 싶어하는 걸 대신 물어주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것. 대통령의 말, 정치인의 말, 아나운서의 말은 신뢰와 겸손이 생명이에요.”

김동건 인터뷰를 읽다가 나는 왜 JFK의 프로스트 추도사가 생각났을까. 거짓의 향연장으로 타락한 정치 때문인가. JFK 추도사는 권력을 대하는 문화예술의 역할을 상기시킨다. 시인은 시인으로서, 아나운서는 아나운서로서 직분(職分)에 충실해야 한다는 메시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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