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은모의 酒저리]두루미양조장,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 술
놀이동산 닮은 즐겁고 행복한 술 만든다
철원오대쌀과 화산암반수로 빚은 수제 전통주
면포로 직접 채주해 부드럽고 깔끔한 술 지향
오래전에 함께 듣던 노래가
발걸음을 다시 멈춰서게 해
이 거리에서 너를 느낄 수 있어
널 이곳에서 꼭 다시 만날 것 같아
너일까봐 한 번 더 바라보고
너일까봐 자꾸 돌아보게 돼
어디선가 같은 노래를 듣고
날 생각하며 너 역시 멈춰있을까
스탠딩 에그, 「오래된 노래」
노래는 기억을 불러들인다. 기억 속 그 노래가 있던 공간과 시간, 함께 듣던 누군가와 그때의 감정까지도. 잊고 있던 기억을 소환해낸다는 점에서 술도 노래와 닮아있다. 어떤 술은 그리움을 닮아서 함께 마셨던 공간과 시간 그리고 나란히 마시던 누군가와 그때의 감정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 술과 같은 노래, 그 노래와 같은 술을 빚는 곳, 강원 철원 ‘두루미양조장’이다.
삼형제가 만든 3인3색 양조장
김종한 두루미양조장 대표의 어머니 유인자 씨는 여장부였다. 그녀는 그 시절 여성으로는 드물게 고압 전기를 다루는 배전 사업에 과감히 뛰어들어 회사를 철원 지역에서 꽤나 이름 날리는 사업체로 당당히 키워냈다. 사업가 기질을 타고 난 그녀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안온한 삶을 살지 않았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었지만 철원을 대표할 만한 새로운 사업 구상을 멈추지 않았다.
탐색에 탐색을 이어가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술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전통주였던 건 아니었다. 유 씨는 우연찮은 기회에 강원대가 일본 동경농대와 함께 철원 오대쌀을 가지고 청주 사업을 추진하고 있음을 듣게 된다. 그녀는 곧바로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밝히며 해당 프로젝트에 뛰어들 준비를 했다. 하지만 2019년부터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 규제로 양국 사이가 급속도로 냉각되면서 해당 프로젝트는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고, 유 씨도 자연스레 손을 떼게 됐다.
예상치 못한 국가 간 마찰에 계획이 틀어졌지만, 유 씨는 꺼내든 칼을 그대로 집어넣을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김 대표를 포함해 세 아들을 불러놓고 일본 술이 아닌 우리 술을 함께 빚어보자고 제안했다. 삼형제는 전통주와는 아무런 연이 없었지만, 어머니의 제안에 하나같이 호응하며 그길로 양조업에 뛰어들게 된다. 뜻은 모았으나 맨손으로 전장에 뛰어들 수는 없었다. 전통주에 문외한이었던 만큼 삼형제는 흩어져 배움을 구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첫째인 김종민 씨와 셋째인 김종한 대표는 한국전통주연구소로, 둘째인 김종호 씨는 한국가양주연구소로 찾아가 각자의 방법대로 전통주를 공부하고 양조를 익혔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둘째인 김종호 씨였다. 그는 2019년 서울 마포에 ‘구름아양조장’을 열고 ‘만남의 장소’와 ‘사랑의 편지’ 등을 연이어 선보이며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막걸리 돌풍을 일으켰다. 소규모양조장인 구름아양조장은 사용할 수 있는 원재료의 제한이 없다는 장점을 살려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양조를 시도했다. 구름아양조장의 이러한 자유분방한 양조 기조는 지금까지도 줄곧 이어져 두루미양조장의 대표 제품인 ‘대관람차’와 ‘한탄강 익스프레스’를 비롯해 개성 있는 다양한 술들이 탄생할 수 있는 토양으로 작용하고 있다.
구름아양조장의 배턴을 이어받은 건 첫째 김종민 씨의 ‘노금주가’였다. 2020년 삼형제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강원 철원군 동송읍 금학로에 문을 연 노금주가는 구름아양조장의 정반대편에 서있는 양조장으로, ‘일지춘’처럼 철저하게 옛 방식 그대로 빚은 클래식한 전통주를 지향한다. 발효제 역시 입국이 아닌 전통 누룩만을 고집한다.
두 형의 뒤를 이어 셋째인 김종한 대표가 마지막으로 문을 곳이 바로 두루미양조장이다. 철원군의 군조(郡鳥)인 두루미를 이름으로 내걸고 2021년 문을 연 두루미양조장은 지역양조장을 지향한다. 김종한 대표는 “두루미양조장은 구름아양조장과 노금주가의 중간 지점에 있는 친근하고 편안한 양조장”이라며 “철원이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일체의 첨가물 없이 철원 농산물로만 술을 빚는 게 기본 콘셉트”라고 설명했다.
삼형제의 세 양조장은 어머니 유인자 씨를 대표로 하는 농업회사법인 우창 아래 나란히 놓인 말 그대로 형제양조장이다. 삼형제는 하나의 양조장 아래 모여 각자 다른 업무를 맡기보다는 각자의 개성을 살려 3개의 양조장을 차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김 대표는 이를 두고 “각자의 장점을 특화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각기 다른 색깔과 콘셉트를 가진 세 개의 양조장을 만들게 됐다”며 “양조장은 셋이지만 기본 철학은 물론 생산공장 등을 공유하며 효율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술은 놀이동산 닮아”…행복의 이미지, 술에 담다
두루미양조장에는 세계관이 있다. 하나의 술이 파편화돼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보다는 고유의 캐릭터와 스토리를 가진 다양한 술들이 커다란 테마 안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만드는 사람이나 마시는 사람 모두 더욱 즐거울 수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관이 놀이동산을 테마로 한 일종의 ‘두루미 유니버스’다. 김 대표는 술이 놀이동산과 닮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놀이동산을 떠올리면 즐거움과 행복, 추억, 소중한 사람 같은 기분 좋은 이미지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라며 “두루미양조장이 빚어내는 술 역시도 그러한 이미지의 연장선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세계관을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두루미양조장의 놀이동산 세계관 속 첫 제품이 ‘대관람차’다. 첨가물 없이 철원 오대쌀과 화산암반수로 빚은 대관람차는 신동호 양조사가 아일랜드에서 대관람차를 탔을 때 느낀 몽환적인 기분을 표현한 술로 은은한 참외향과 바나나향이 특징이다. 대관람차가 정점에 오르는 12시 방향에서 착안해 알코올 도수도 12도(%)로 맞췄다. 대관람차와 함께 놀이동산 세계관을 이끄는 제품이 ‘한탄강 익스프레스’다. 소지섭 양조사가 놀이동산의 급류타기를 모티브로 만든 한탄강 익스프레스는 철원을 흐르는 한탄강에 헌정하는 술이기도 하다. 단맛이 강조된 대관람차와는 다르게 드라이한 맛이 특징이며 알코올 도수는 대관람차와 같은 12도다.
두루미양조장의 술은 하나같이 깔끔하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김 대표가 탁도에 예민하고 걸쭉하고 텁텁한 술을 지양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두루미양조장은 부드럽고 깔끔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기계 대신 양조사의 손으로 직접 채주(술을 거르는 작업)를 고집한다. 김 대표는 “지게미가 술에 뭉개져 걸쭉하게 나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면포에 원주를 직접 짜는 방식을 택했다”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생산량이 줄어들지언정 모든 술을 한약 짜듯 손으로 직접 짜서 최대한 맑은 술을 얻으려는 게 두루미 양조 공정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스탠딩 에그와 협업도…"전통주도 세련되게 마실 수 있어"두루미양조장은 놀이동산 세계관 외에도 다양한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가수 ‘스탠딩 에그’와 손잡고 선보인 탁주 ‘오래된 노래’가 대표적이다. 스탠딩 에그의 동명의 노래를 제품명으로 삼은 오래된 노래는 병 라벨을 노래 가사로 꾸몄고, 라벨 뒷면에는 QR코드를 삽입해 스탠딩 에그가 직접 선곡한 ‘술 마실 때 듣기 좋은 플레이리스트’를 들을 수 있게 했다.
김 대표는 “술과 음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강조하며 아티스트와의 협업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코로나19 이후 홈술·혼술이 늘어난 상황에서 전통주도 세련된 느낌으로 분위기 있고 즐겁게 마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혼자서든 여럿이든 큐레이션된 음악과 함께 술을 즐긴다면 마시는 즐거움이 배가될 것이라고 자신한다”고 말했다.
두루미양조장은 향후에도 협업 제품을 지속적으로 출시하고, 한정판 제품이 아닌 정규 제품으로 가져간다는 방침이다. 최근에는 오래된 노래에 이어 스탠딩 에그와 다시 한 번 손을 잡고 프리미엄 약주 ‘농담’을 출시했고, 전통주 페어링 다이닝 바 ‘탈롱드청담’과 함께 ‘탈롱 본’도 선보였다. 협업 제품 외에도 조만간 기업간거래(B2B) 제품으로 커스터마이징 약주 ‘위드 두루미’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힐 계획이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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