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쌀도 마스크처럼 될라
불과 3년여 전인 2020년 2~3월만 해도 마스크 구매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코로나19가 급격히 확산하면서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는데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가격이 치솟았다. 한 장에 200~300원이면 살 수 있었던 일회용 마스크 가격이 1500원 이상 뛰어올랐던 걸로 기억이 난다. 그나마도 구하기가 힘들어지자 정부는 마스크 5부제까지 실시했다. 마스크를 살 수 있는 날을 달력에 표기해가며 약국 앞에 줄 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다만 이런 상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대통령 한마디 덕분이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3월 6일 경기 평택시에 있는 한 마스크 생산업체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생산량을 충분히 늘려 달라 주문하며 “상황이 안정·종식되고 수요가 줄어도 생산업체가 물량을 조정해낼 수 있는 충분한 기간까지 남는 물량을 정부가 전량 구매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다 살 테니 판로 걱정을 하지 말라는 이 말에 사업에 관심 있는 이들이 너도나도 마스크 생산 전쟁에 뛰어들었다. 찍기만 해도 돈이 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마스크 공급은 안정됐지만 후폭풍이 몰아쳤다. 이미 2020년 하반기부터 마스크 과잉 공급 우려가 불거졌다. 그나마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의무화 조치 덕분에 버티던 업체들도 방역 단계 완화 이후 재고만 늘어간다고 한다. 웃돈까지 얹어 팔던 마스크는 이제 한 장에 200~300원대로 돌아갔다. 생산 조절 때까지 남는 물량은 정부가 전량 구매하겠다던 대통령의 확약은 정권 교체와 함께 사라졌다. 마스크 공장을 운영 중인 A씨는 21일 “대통령 한마디에 뛰어들었다가 피해 본 이들이 주변에 부지기수다. 우리도 겨우 버티는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마스크 사례는 정부가 시장에 인위적 개입을 할 경우 후폭풍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면 믿었던 ‘탈출구’도 사라진다. 5년 단임제인 한국 현실에서는 이 변수를 무시하기가 힘들다. 정부의 인위적 시장 개입은 최소화하는 게 맞는다는 경제학자들의 말을 곱씹게 만들기도 한다.
쌀도 마스크 꼴이 될 뻔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야 정쟁 최전선 이슈는 쌀이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1호 법안인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놓고 첨예한 다툼이 일었다. 거대 야당은 쌀 생산량이 일정량 이상 수요를 초과하거나 쌀 가격이 일정 수준 이상 떨어지면 정부가 의무적으로 쌀을 수매해야 한다는 안을 밀어붙였다. ‘의무화’는 안 된다는 정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했지만 결국 윤석열 대통령 1호 거부권 법안이란 이름을 남긴 채 사라졌다. 법이 통과됐다면 ‘남는 물량을 정부가 전량 구매하겠다’는 동일한 프레임이 쌀에도 적용될 뻔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야당 의원들은 양곡관리법 개정안 재의결이 무산되자 후속 입법에 착수했다. 윤준병 민주당 의원을 필두로 엇비슷한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이렇게 발의된 법안들이 어떤 형태로든 ‘의무화’란 이름을 달고 법제화됐을 경우를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일단 벼농사를 지을수록 유리한 이 법안대로라면 많은 농업인이 벼농사로 눈을 돌릴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정부 예산이 화수분이 아닌 이상 언젠가는 공급과잉된 쌀을 수매하는 데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다. 마스크 의무화 해제 후 정부 구매라는 말이 쏙 들어간 것처럼 말이다. 그때 발생하는 사회적 분란은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피해는 벼농사 짓는 사람들이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
농업 비대칭도 걱정되는 요소다. 인구가 줄면서 가뜩이나 농사짓겠다는 이들도 줄고 있는데 다들 쌀농사만 짓는다면 어떻게 될지 자명하다. 쌀 외에 다른 품목은 수입해 먹는 수밖에 없다.
외교적 압박도 예상된다. 한국은 자유무역협정(FTA) 강대국이지만 쌀만큼은 무역장벽이 높다. 농민들을 위해 513%의 어마어마한 관세율을 매긴다. 이는 정부 보조금 등을 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유지되는 장벽이다. 지난 정부에서 직불금을 의무가 부여된 공익직불금으로 바꾼 것도 이를 감안한 조치다. 그런데 정부가 남는 쌀을 다 수매하는 식으로 예산을 투입한다면 쌀시장 개방 압력이 생길 수 있다. 이건 또 누가 책임질 건가.
그렇지 않아도 국민은 현실 속에서 겪는 힘든 일이 부지기수다. 전 국민 현안도 아닌 쌀 하나 놓고 정쟁이 이어지는 모습을 그만 좀 보고 싶다.
신준섭 경제부 기자 sman32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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