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전 끔찍했던 그날, 유족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
[이준목 기자]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
ⓒ SBS |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침몰사고, 이태원 압사 참사. 모두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아픈 상처를 남긴 사건들이다. 그리고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어쩌면 '막을 수 있는 비극'이었다는 데 있다. 2023년의 대한민국에서도 당연히 지켜져야 할 책임과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언제든 동일한 비극은 반복될 수 있다.
'1995년 대구 가스폭발 사고' 우리가 막지 못한 비극 중 하나다. 20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는 무는 이야기> 75회 '8cm가 부른 죽음 -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편은 작은 부주의와 안전불감증이 얼마나 큰 대형사고를 초래할 수 있는지 조명했다.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인 1995년 4월 28일의 대구 상인동, 상인네거리 인근에서는 각각 지하철 1호선 상인역 건설공사와 백화점 건설 공사가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현장에는 도로 위에 차와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게 복공판(지하 공사시 도로 이용을 위해 도로 면에 임시로 깔아두는 강철제의 판)을 덮어놓은 상태였다.
백화점 건설 현장에서 지반을 뚫는 천공 작업이 진행되던 중, 천공 기사는 이상한 점을 감지한다. 드릴이 땅 속에 설치된 가스관을 뚫는 사고를 내면서 가스가 누출되기 시작한 것. 작업은 즉시 중단되었고 도시가스 회사로 신고했지만 그 와중에도 가스는 계속해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가스가 폭발한다면 엄청난 사고가 벌어지는 상황.
하지만 이를 모르는 시민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상인네거리 일대를 지나고 있었고, 아침 시간이라 거리 인근에는 저마다 등교와 출근을 하려는 학생들과 직장인들, 그리고 그들을 태운 차량으로 가득했다.
오전 7시 52분, 엄청난 폭발음이 일어나며 평화롭던 대구의 아침을 뒤흔들어놓았다. 백화점 공사 현장에서 누출된 가스가 결국 폭발한 것이다. 바로 1995년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트린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난 순간이었다.
이 현장을 바로 눈 앞에서 목격한 것은 등교하던 중학생 정우진씨였다. 어느덧 40대의 나이가 된 정우진씨는 폭발사고의 생존자이자 목격자로서 당시의 참상을 이렇게 증언했다. "갑자기 뻥! 소리가 나면서, 버섯 모양으로 폭발이 되는 게 제 눈 앞에 보였다. 한 30미터 앞? 너무 비현실적이라 '이게 뭐지? 영화 찍는 건가?' 싶었다"고 회상했다.
우진씨는 당시 간발의 차로 버스를 놓치며 바로 뒤에 온 30번 버스를 타게 된 것이 생사의 운명을 바꿨다. 우진씨는 "버스를 하나 놓친 게 아직까지도 생각이 난다. 너무 간발의 차로 놓쳐서"라며 믿기 어려웠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가스가 폭발한 곳은 대구 지하철 공사장 쪽이었다. 가스가 처음 누출된 지역은 백화점 공사 현장이었는데, 정작 폭발은 몇십 미터나 떨어진 지하철 공사현장 인근에서 터지며 일대가 완전히 페허가 되어버렸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지하에는 여러가지 매설물들이 설치되어있다. 상인동 일대에는 중압관과 유수관 두 개의 가스관이 있었다. 처음엔 백화점 공사장에서 천공작업을 하다가 파손된 것은 지름 약 100mm크기의 중압관이었다. 약 8cm 정도의 구멍이 발생하며 유출된 LPG 가스는 마치 살아있는 듯 흙 사이사이를 움직여 이동하다가 인근 지하철 공사장 쪽에 있는 우수관으로 유입됐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
ⓒ SBS |
발화의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새어 나온 가스는 LPG(액화석유가스)로 가정, 업무, 공업, 운송 등 다양한 분야의 연료로 사용된다. LPG의 중요한 특징은, '발화점'이 굉장히 낮아서 불이 잘 붙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정전기에도 불이 붙을 수 있을 정도다.
당시 폭발의 위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무게가 약 280kg이나 나가는 무거운 복공판(지하철상판)이 폭발로 인해 3층 건물의 옥상까지 날아올랐을 정도였다. 사고 주변의 건물들은 큰 피해를 입었고 주변 한옥 주택까지 복공판이 날아와 지붕 위에 꽂히기도 했다. 당시 지하철 공사 현장에서 폭발의 영향으로 날아오른 복공판들의 규모는 인근 400m 구간에 이르렀다. 복공판이 원래 있던 자리는 벌집처럼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당연히 폭발 당시 복공판 위를 지나던 차량과 사람들까지 전부 복공판과 함께 날아올랐다가 15m 아래로 추락했다.
폭발 당시 121번 버스는 승객 약 100명을 태운 상태로 인근을 지나던 중이었다. 당시 버스기사였던 임해남씨는, 신호 대기 중일 때 갑자기 발 밑에서 쾅쾅 소리가 두 번 울리며 폭발이 벌어졌다고 증언했다. 폭발의 충격에 휩쓸린 버스 안은 아비규환이 되었고, 설상가상 불까지 붙었다. 임해남씨는 처음엔 운전석 옆 창문을 열고 혼자서 간신히 버스를 빠져나와 대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버스에 갇혀서 구해달라고 울부짖는 승객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언제든 2차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촉측발의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시내버스 기사인데, 승객들을 보호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버스로 뛰어가서 사람들을 구조했다.
임해남씨의 헌신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다. 이어 다른 시민들과 힘을 합쳐 아니라 앞쪽 승용차에서 아이와 아버지까지 구해냈다. 임해남씨는 "다행히 제가 탄 버스 승객 중에는 다친 분은 있어도 사망자는 전혀 없었다"고 회상하며 안도했다.
사고가 터지자 대구에 있던 모든 소방서에 비상이 걸렸다. 당시 경력 12년차 소방관인 김호제 대구중부소방서 구조대장은 "현장이 전쟁터 같았다, 폭격 이상이었다"고 회상했다. "정상적으로 서 있었던 차들은 거의 없었다. 차가 솟았다가 떨어지면서 사람이 튕겨 나와서 공사장 철근 위에 떨어지기도 했다. 지하에는 피투성이가 된 분들, 또는 아우성 치는, 신음하는 분들, 숨이 멎은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그날의 참상을 떠올렸다.
280kg짜리 복공판에 정통으로 맞으며 신체가 훼손된 사람들이 많았다. 구조대원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면서 훼손된 신체 부위까지 함께 옮겨야했다. 좀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친구, 아이를 학교에 태워다 주던 부모님, 출근 중이던 직장인 수백명이 이 도로 위에서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가족과 지인들의 생사를 묻는 전화가 119에 빗발치며 대구시 전체는 완전히 혼돈의 카오스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엄청난 사고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디어에서 긴급 속보나 특보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방송은 자막으로 대구 상인동 네거리에서 가스 폭발이 있었다'고만 간략하게 전달하는 데 그쳤다. 심지어 잠시 후에는 TV에서는 사고 현장 관련한 특보가 아니라 고교야구 중계가 방송됐다.
SNS, 인터넷 등을 통해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지금과 1995년 당시는 달랐다. 방송 편성시간 제한 때문에 정규방송 시간 외에 방송을 하려면, 공보처에 사전 허가를 받아야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방송도 없고 정확한 정보가 전해지지 않으니 실종자 가족들은 사고가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혼란에 빠져서 직접 뛰어다녀야 했다.
남겨진 이들에겐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다. 폭발 참사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101명. 부상자는 200여 명에 이르렀다. 10대가 51명으로 절반이 넘고, 43명이 영남중학교 학생들이었다. 영남중학교는 교사 1명을 포함하여 총 44명이 같은 날 세상을 떠난 비극을 맞이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미래를 앗아간 가스폭발사고는 왜 일어난 걸까? 대도시 한복판에서 공사를 한다면, 가스관이 묻혀있을 걸 당연히 알았어야 하지 않을까? 도시가스관 매설지역에는 '라인마크'라는 표지못이 존재한다. 그날 천공 작업을 했던 도로에도, 가스관이 2개 매설돼 있었다는 라인마크가 존재했고, 심지어 가스관 매설을 위해 도로를 절개했던 흔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가스관이 묻혀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하 매설물이 어디 있는지 파악하고 주변을 파서 직접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자 상식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눈으로 어림잡아 헤아리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렇다 보니 가스관을 건드리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이어졌다.
당시 공사 중이던 백화점은 지반 공사가 두 달 정도 지연된 상태였고, 기한에 쫓겨 천공기를 다른 공사장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급하게 일을 처리하다 보니,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고 주의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이 최악의 가스폭발 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
ⓒ SBS |
101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 책임자들은 어떻게 됐을까? 천공 작업을 했던 하청업체, 백화점 공사 관계자들은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형량은 고작 벌금형이거나 징역 3~5년에 그쳤다. 그마저도 형량이 무겁다고 항소에 상고를 거듭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이 사고를 계기로 국내 도시가스 안전관리 시스템이 완전히 바뀐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현재는 15km마다 안전 점검원이 배치돼 가스가 새는지 철저히 감시하게 했다. 사고 이후로 전국적으로 '지하지도'가 제작되며 지하에 매설된 도시가스, 상하수도, 고압 전선, 통신 케이블 등 수많은 시설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정확히 모르고 위험천만하게 공사를 진행하던 잘못된 관행을 개선했다. 거하 매설물을 포함한 각종 지리 정보를 컴퓨터 데이터로 변환한 정보 처리 시스템 GIS(Geographic Information System)가 구축됐다.
하지만 왜 세상은 항상 큰 사고가 난 후에 바뀌는 걸까. '어떤 사고가 터진다는 것은 비슷한 사고가 적어도 10번을 더 일어날 가능성을 숨기고 있는 것'이라는 격언도 있다. 실제로 1990년대는 다수의 인명피해로 이어진 대형사고가 유난히 많았던 시기였다.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사건, 1995년 5월 대구 가스폭발 사고,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까지. 불과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일어난 대형 참사들이었다.
참사 후 어느덧 2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사고가 있었던 상인네거리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었고, 이제는 사고를 기억하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남겨진 유족들에게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생생하고 아픈 기억들이다.
유족들이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도 여기에 있다. '말해봐야 뭐가 바뀔까?' '시간이 흘렀다고 지나가고 잊으면 되는 걸까?'라는 의문들. 하지만 2023년 현재까지도 안전사고와 대형참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누군가는 이 반복의 고리를 끊어야만 한다.
그래서 유족들은 다시 꺼내기조차 힘든 그 기억을 힘들어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희생자들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더라도, 그들을 잊지 않고 많이 기억해주는 것은 남겨진 우리들의 몫이기에.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학교서 발견된 마약, 교사가 아이들에게 다가간 이유
- 소문이 사실이었다, 9년 만에 돌아오는 마이클잭슨 후계자
- "올 게 왔구나 했다" 빈틈 꽉 채운 '맛있는 녀석들' 새 멤버들
- 드라큘라의 '가스라이팅'을 극복하는 방법
- 165분의 여정... 기립 박수 터진 '파우스트' 흥행 요인
- 첩보요원으로 분한 양조위, 한국 상업영화와 이렇게 다르다
- '골때녀' 4연패 탈출한 국대패밀리... 287일 만의 값진 승리
- 가짜 경찰 행세하다 반장으로까지 임명된 남자의 사연
- 17년 살아남은 명작, 특별한 모텔 열쇠의 비밀
- "목숨 위태로웠던 순간도..." '시골경찰'에 담긴 진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