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녹두꽃' 출간 사연

김삼웅 2023. 4. 21.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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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 62] 임시정부 사람들은 '조선의 잔 다르크'라 불렀던 여걸 '정정화'

[김삼웅 기자]

 독립운동가 어머니 정정화 여사 품에 안긴 김자동 선생
ⓒ 김자동
 
어느 자식인들 어머니가 소중하지 않을까 마는 김자동에게 어머니 정정화 여사는 남달랐다. 개인적으로는 비운의 여인이지만 가정적으로는 강건한 버팀목이었고, 국가적으로는 흔치 않은 여걸이셨다. 임시정부 사람들은 '조선의 잔 다르크'라 불렀고, 실제로 상당기간 임정의 안살림꾼 노릇을 하였다. 

아무리 조혼풍습이라지만 열 살에 결혼하여 19살에 첫 딸을 출산했으나 바로 잃고 스무 살에 망명한 남편과 노령의 시아버지 수발을 들고자 뒤를 따라 단신으로 상하이로 찾아간다. 120여 년 전 외적이 지배한 서울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를 거쳐 상하이 가는 길은 호적과 산적이 우글대고 말도 통하지 않는 만리길이었다.

젊은 여인은 상하이에서 남편의 품안에 머물지 않았다. 나라 찾고자 떠난 지사들의 배곯는 모습을 보다 못해 자원해서, 남정네도 하기 힘든 독립자금 모금의 사명을 띠고 지하조직을 통해 국내로 잠입한다. 

두 번째 국내로 들어오던 1921년 봄, 친정아버지가 차라리 외국으로 유학이나 가라는 만류를 뿌리치고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세 번째 입국 때에 신의주에서 왜경에 붙잡혀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에 갇혔다. 해방 후 그곳에 다시 갇힐 줄이야 그때 어찌 상상이나 했으랴. 간신히 풀려난 뒤에도 3차례나 더 들어왔다. '푼돈'이지만 독립지사들에게는 생명줄이었다. 스물여덟이던 1928년 아들 후동(자동)이 태어났다. 

남편과 한국독립당 창건에 참여하고, 윤봉길 의거 후 머나먼 대륙을 임시정부와 함께 고난의 행군을 하였다. 임시정부 청사 옆에 기거하면서 임정의 독신 국무위원들 뒷바라지를 하였다. 한독당 제1기 집행위원, 한국애국부인회 집행위원 겸 훈련부 주임, 임정 외교위원회 위원도 역임하였다. 

해방 이듬해 고국으로 돌아왔고, 1948년 남편은 김구 일행과 함께 평양을 방문, 한독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가했다. 그리고 6.25 전쟁 통에 납북되어 생사를 모르는 채 세월이 흘렀다. 자신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방한 때는 엉뚱하게 '요시찰인'으로 예비검속을 당하기도 했다. 가난과 병고와 소외, 빨갱이 가족이라는 따돌림이 떠나지 않았다. 

1986년 86세 때에 백내장 수술로 한쪽 눈을 실명한다. 그런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한문 실력이 대단하여 한자로 시를 지을 정도였다. 1.4후퇴 당시 서울에 남아 지은 시 <철옹성>과 출옥 후에 쓴 <옥중소감>등이 남아있다.

그런 어머니가 1991년 12월 2일 91세로 소천하셨다. 50세 때 남편의 납북으로 홀로 된 이래 40여 년을 조국통일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에게 망명 27년과 분단 46년은 기다림의 세월이었다. 조국해방과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 1935년 난징에서 김의한과 정정화, 김자동 동농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는 중국에서 임시정부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사진 속 아이는 김의한과 정정화의 아들 김자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살아 있는 여자독립군' 얘기가 1980년대 중반 입소문을 탔고, 한사코 마다하는 것을 출판인이 설득하여 <여자 독립군 정정화의 낮은 목소리 - 녹두꽃>이 1987년 3월 도서출판 <미완>에서 간행되었다. 주인공의 <못난 줄 알건만 털어놓고 하는 말>의 한 대목이다. 

또 내 이야기가 전혀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니 상해 시절부터 한 집안 식구처럼 지냈던 나절로(우승규)가 특히 앞장서 나를 일컬어 '한국의 잔 다르크'라고까지 신문에 소개하기도 했다. 실로 지나친 표현임에 틀림없으나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영웅도 시기에 맞추어야 영웅 소리를 듣는다. 그나마 내가 없는 자격에 며칠 저녁의 읽을거리라도 엮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타고난 시대가 험난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내 몸 속에 투쟁가나 혁명가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욱 나는 내 과거의 행적에 대해 뉘우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보고 듣고 겪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 바람은 이 글이 특히 젊은이들에게 읽혀졌으면 하는 것이다. 바로 알았으면 하는 것이다. (주석 1)

주석
1>정정화, <녹두꽃>, 14쪽, 미완,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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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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