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미의 영화로 보는 세상] 절망적인 우리 사회의 자화상

데스크 2023. 4. 2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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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킬링 로맨스’

한국영화에 대한 우려가 쇄도한다. 아무리 3~4월이 극장가 비수기라고 하지만 개봉하는 영화마다 흥행성적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일본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은 4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장기간 박스오피스 1, 2위를 차지하고 있고 할리우드 영화 ‘존윅 4’도 개봉 1주 만에 100만 관객 동원을 앞두고 있다. 결국, 관객들이 한국영화를 찾지 않는다는 얘기로 풀이된다. 지난 14일 개봉한 이원석 감독의 ‘킬링 로맨스’는 비록 관객들의 반응에 있어 호불호가 갈리지만 평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톱스타 여래(이하늬 분)는 11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지만 한 편의 영화출연으로 발연기 배우라는 조롱 섞인 수식어를 얻게 된다. 여래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에 남태평양의 콸라섬으로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재벌 조나단(이선균 분)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다. 졸지에 연예계를 은퇴하게 된 여래는 7년 동안 남편의 간섭에서 벗어나 다시 연예계 복귀를 계획하지만 조나단의 반대로 무산되자 자신의 팬이자 앞집에 사는 범우(공명 분)와 남편의 죽음을 공모한다.


영화는 부조리한 전개로 새로운 재미를 창조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업영화는 일정한 공식을 따르기 마련이다. 코미디, 액션, 드라마, 뮤지컬 등의 장르 영화에는 정형화된 이야기 구조, 캐릭터, 장면 등이 있다. 때문에 장르 영화를 보면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킬링 로맨스’는 여러 장르가 혼재되어 있다. 판타지와 드라마,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가 절묘하게 혼합돼 영화는 예측 불가하게 전개된다. 맥락도 의미도 없다. 이치에 맞지 않는 모순적인 전개는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합리적인 의미 부여를 제거하고 보면 달라진다. 오히려 ‘킬링 로맨스’의 부조리한 전개는 창조적인 재미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점이 기존의 가치와 충돌하며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다.


우리 사회의 절망적인 한계상황을 대변한다. 영화는 엉망진창이다. 기존의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세트는 많은 공을 들였음에도 B급 정서가 가득하다. 유명한 음악가 달파란이 OST를 맡았지만 정작 가수 비와 H.O.T의 노래만이 밈처럼 영화를 덮는다. 영화는 동화책을 읽는 컨셉으로 시작해 웨스 앤더슨과 팀 버튼 감독의 미장센을 차용하고 주성치 풍의 코미디를 첨가했지만, 키치함만 가득할 뿐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 여래가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남편의 가스라이팅과 가정 폭력 때문인데 행동의 동기는 사라진 채, 여래는 목적 없이 질주하기만 하고 범우는 조력자로서 역할도 하지 못한다. 영화의 이러한 전개는 우리 사회에 대한 소리 없는 반항이며 젊은 세대의 절망감을 나타낸다. 영화가 10~20대의 지지를 받는 이유가 한계상황에서 세상의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아버린 젊은 층의 자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면이 평가된다. 이원석 감독은 전작 ‘남자사용설명서’에서 B급 코드로 웃음을 안겨줬다. 상업영화에서 투자배급사의 영향력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감독의 자율성은 배제된다. 하지만 ‘킬링 로맨스’에서는 감독의 자율성이 많이 반영되면서 장르와 형식을 비트는 전혀 다른 영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제작으로 한국 상업영화의 다양성을 넓혔다는 점에서 역할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부조리가 만연하고 불평등이 커지면서 점차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젊은 세대의 상실감 또한 커지고 있다. 영화 ‘킬링 로맨스’는 정상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뜬금없는 전개를 통해 부조리한 우리 사회를 고발하고 절망하는 젊은 세대들의 소리 없는 자조를 보여주고 있다.


양경미 / 전) 연세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film10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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