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욱의 문화재전쟁] 스탈린의 실책? 500년 잠든 ‘초원의 군주’ 왜 깨웠나
티무르 무덤의 저주
티무르는 칭기즈칸에 필적할 만한 엄청난 제국을 이룬 초원의 최후 군주였다. 티무르의 무덤은 스탈린 시절인 1942년 발굴됐는데, 그와 동시에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사회주의 장벽에 갇혀서 지금껏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티무르 무덤의 발굴 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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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기 중앙아시아 휩쓴 티무르
칭기즈칸에 버금가는 ‘정복의 왕’
러시아 지배한 몽골 세력 쫓아내
그에 감화된 스탈린이 발굴 명령
무덤 열자마자 독일의 침공 받아
애꿎은 고고학자만 총살형 당해
」
우즈베키스탄의 대표 유적
티무르는 동아시아까지 진출한 군주가 아니었기에 우리나라에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중앙아시아 역사를 안다면 칭기즈칸에 필적할만한 정복 군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티무르는 현재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근처에서 태어났다. 몽골족 출신이지만, 튀르크어를 쓰는 바를라스족이다. 특히 이슬람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티무르는 칭기즈칸의 용맹함에 마호메트의 종교를 물려받은 중앙아시아의 후예다. 불과 33세에 우즈벡 일대를 통일하고, 이후 죽을때까지 기상천외한 전략으로 몽골은 물론 동유럽, 인도와 오스만튀르크까지 제패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사마르칸트를 건설했다. 사마르칸트 중심지 레기스탄에 있는 그의 무덤은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하는 유적이다. 무려 500여년간 잠들어 있던 티무르의 잠을 깨운 사람은 스탈린이었다. 소련을 장악한 스탈린은 러시아 역사책을 읽다가 티무르 부분에 주목하고 ‘타타르의 멍에에서 구해준 구세주!’라고 메모해 두었다. 그가 갑자기 티무르에 관심을 보인 데는 러시아의 아픈 역사가 숨어 있다.
‘타타르의 멍에’ 벗겨준 구세주
러시아는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혹독하게 240여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았고, 그 트라우마를 ‘타타르(몽골을 의미함)의 멍에’라 불렀다. 끝도 없을 것 같던 몽골의 지배를 끝낸 사람이 다름 아닌 티무르였다. 티무르는 당시 러시아를 지배하던 킵차크한국(조치 울루스)을 물리쳤다. 그때 독립한 모스크바 공국이 지금 러시아의 기반이 됐으니, 티무르는 러시아의 은인인 셈이다.
스탈린과 티무르의 이름은 모두 철, 또는 강철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변방에서 태어나 신체적 결함을 딛고 유라시아를 제패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스탈린도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그루지야(조지아) 출신이며 곰보 얼굴에 다리도 살짝 절었다. 그는 절름발이라는 놀림을 받으며 유라시아를 제패한 티무르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때마침 카자흐스탄에서 티무르의 전승비가 발견됐고, 스탈린은 그의 무덤을 발굴하고 티무르 특별전을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열라고 지시했다. 사실 당장 파괴될 위험이 없는 옛 영웅의 무덤을 급하게 발굴할 이유는 없었다. 수많은 고고학자가 숙청돼 전문 인력도 부족한 때였다. 하지만 독재자 스탈린의 명령에 누가 반대할 수 있었겠는가.
신체 장애 극복한 전설의 영웅
티무르는 구르-아미르(페르시아어로 왕의 무덤이라는 뜻) 지하에 부인과 후손들과 함께 묻혀 있었다. 발굴단장인 미하일 게라시모프(1907~1970)는 유적 한가운데에 있던 무덤 뚜껑을 열고 가장 먼저 무릎뼈부터 확인했다. 여러 사료에서 티무르는 절름발이였다고 기록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릎뼈의 변형이 심해서 티무르임이 확인됐다.
놀라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티무르는 오른손마저 불편했다. 활쏘기는커녕 팔을 완전히 펼 수 없을 만큼 관절에 변형이 온 상태였다. 강한 체력과 전술이 필수인 유목민으로서 팔다리가 불편한 몸으로 칭기즈칸에 필적할 만한 무공을 쌓았으니, 티무르가 칭기즈칸을 능가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더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무덤이 발굴되고 36시간이 지난 직후 히틀러의 나치가 러시아를 침략했다는 비보가 알려졌다. ‘전쟁의 왕’ 티무르의 무덤을 발굴하자마자 독일이 침공했으니 사람들은 티무르의 저주라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물론 소련은 연관성을 부인했지만, 전쟁 직후 소련이 독일에 밀리면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스탈린은 발굴 1년이 지난 후에 100만 루블을 들여서 무덤을 보수하고 티무르의 유골을 다시 넣으라고 지시했다. 당시 1개 사단이 1달간 먹고 입는 비용에 달했으니, 스탈린의 불안했던 마음을 보여준다. 그 효과 때문인지 1942년 12월 티무르의 뼈는 사마르칸트로 되돌아왔고, 그때를 기점으로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기를 잡으며 전쟁 판도를 뒤집었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기이하다.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모티브
지금도 티무르 무덤 발굴을 둘러싸고 수많은 이야기가 내려온다. 관뚜껑을 열 때 현장 기계가 멈추는 등 사고가 잇따랐다. ‘내 무덤을 건드리면 이 세상은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문구가 적힌 관을 여는 순간 자욱한 연기가 퍼지면서 사람들이 기절하고, 심지어 티무르의 영혼이 하늘로 연기처럼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의 이야기는 할리우드 영화 ‘인디애나 존스’ 1편의 결말에서도 비슷하게 재현됐다. 사실 이런 루머는 근거가 없다. 발전기가 꺼지고 기중기가 부러지는 등의 자잘한 사고는 여느 발굴장에서도 일어난다. 다만 티무르의 석관을 여는 순간 연기가 피어오른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전쟁터에서 죽은 티무르를 사마르칸트로 옮겨오기 위하여 엄청난 양의 향료와 약초를 무덤에 넣었기 때문이다. 그의 석판에 쓰였다는 저주 또한 사실 이슬람 『꾸란』의 한 부분을 인용한 것이 와전된 것이다.
티무르의 괴담은 전쟁 앞에서 초조해했던 스탈린과 소련 당국의 조급함이 빚어낸 결과였다. 관련 사실이 당시 발굴 과정을 녹화한 영화감독의 증언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소련 정부는 ‘티무르 전시회’를 취소했고 이 과정을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도 소련이 무너진 후에야 공개됐다.
스탈린의 조급함이 빚은 참사
고고학의 저주는 사실 믿는 자의 것이다. 티무르의 무덤이건 투탕카멘의 미라이건 정작 발굴을 지휘한 고고학자들은 피해를 보지 않았다. 투탕카멘을 발굴한 고고학자 카터, 티무르 무덤을 발굴한 게라시모프는 천수를 누리며 널리 존경을 받았다. 오히려 고고학자들에게 저주를 내린 사람은 스탈린이었다. 게라시모프의 지도교수를 비롯하여 셀 수 없이 많은 고고학자가 수용소에서 총살당하거나 실종됐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은 자신들의 독립을 상징하는 민족적 영웅으로 티무르를 내세웠다. 엄밀히 따지면 티무르는 우즈벡인의 기원인 오구즈 튀르크인을 무찌른 이방인 군주이다. 그런데 초대 대통령 카리모프와 현 대통령 미르지요예프는 모두 티무르의 고향인 사마르칸트 출신이다.
반면 현재 우즈베키스탄 수도인 타슈켄트는 러시아가 만든 도시다. 현 정부가 티무르를 내세우는 것은 정쟁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우즈베키스탄의 오늘을 상징하기도 한다.
유럽·러시아·중국의 세력 대결
티무르 정복 전쟁의 여파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앙카라 전투에서 당시 유럽을 위협하던 오스만튀르크를 격파했고, 그 여파로 유럽은 튀르크의 입김에서 벗어나 도약할 수 있었다. 그 직후 유럽은 신대륙을 발견하는 대항해시대를 주도하며 잡은 세계의 주도권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또 유라시아의 패권은 티무르의 정벌 직후 몽골에서 독립한 러시아가 잡게 되었다.
티무르는 동아시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티무르는 중국 정벌 도중 병사했다. 당시 명나라는 도저히 티무르의 군사를 막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티무르 제국의 중국 침공은 중단됐고, 대신 만주에서 기원한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며 현대 중국의 기반이 됐다. 티무르는 몽골의 판도를 깨고 유럽·러시아·중국이라는 현재 세력의 축을 세운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갑작스러운 해결)’였던 셈이다.
지금 유라시아 곳곳에서 벌어지는 세력 간 충돌은 결국 티무르가 남긴 역사적 유산인 셈이다. 티무르 저주는 어쩌면 지금도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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