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판 '우생순', 진한 여운 남긴 캐롯의 돌풍

이준목 2023. 4. 20.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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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KGC 인삼공사, 캐롯에 89-61로 대승... 신화도 막 내렸다

[이준목 기자]

개구리군단의 농구판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신화가 막을 내렸다.

4월 19일 고양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22~23 프로농구 4강 플레이오프(PO·5전 3선승제) 4차전에서 안양 KGC 인삼공사는 캐롯에 89-61로 대승을 거뒀다.

3승 1패를 기록한 KGC는 3시즌 연속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성공하며 서울 SK와 2년 연속 우승을 놓고 다투게 됐다. 그리고 악조건 속에서도 고군분투했던 캐롯 선수단의 뜨거웠던 봄 농구 여정도 4강에서 멈추게 됐다.

올시즌 캐롯만큼 다사다난했던 팀도 없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인 의미로든, 캐롯은 시즌 내내 농구계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캐롯의 운영주체는 대우조선해양건설을 모기업으로 하는 법인인 데이원자산운용(데이원스포츠)이다. 데이원은 지난 2022년 고양 오리온 농구단을 인수하여 재창단하며 연고지를 그대로 계승했다. 농구계 레전드이자 방송인으로 주가를 높이고 있던 허재를 공동 대표이사로, 안양 KGC의 우승주역인 김승기 감독과 FA가 된 슈터 전성현 등을 영입하며 화제를 모았다. 또한 프로농구계 최초로 네이밍 스폰서제도를 도입하며 캐롯손해보험이 초대 메인 스폰서를 맡으며 팀명도 고양 캐롯 점퍼스로 정해졌다

하지만 데이원은 출발부터 구단 운영에 연이어 의문부호가 붙으며 불안감을 자아냈다. 데이원은 이미 오리온과의 인수 협상과정에서 잡음이 있었고, 지난해 6월에 KBL에서 진행한 신규 회원사 가입 심사에서는 구단 운영계획 등의 자료 부실을 이유로 회원 가입이 한 차례 보류되었다가 모기업인 대우조선해양건설의 지원 보증 자료를 제출한 끝에 겨우 가입이 승인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또한 정규시즌 개막을 앞두고서는 KBL 가입급 15억 원 중 우선적으로 납부해야 하는 5억 원을 미납했다가, KBL의 정규시즌 출전 불허 경고를 받고 나서야 간신히 1차 가입금을 납입했다.

시즌이 개막한 후에도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데이원은 지난 1월부터 계속해서 선수단과 사무국 임금을 제때 지불하지 못하며 신뢰를 잃었다. 심지어 모기업인 대우조선해양건설은 경영상태가 악화되며 지난 2월 법원으로 기업 회생절차 개시결정을 받았다. 또한 메인스폰서인 캐롯손해보험이 데이원스포츠와 상호협의 후 지난 3월 네이밍스폰서십 계약을 종료하기도 했다. 결국 데이원은 창단 1년도 안 되어 농구단 운영을 포기하고 새로운 기업과 인수 협상을 진행중인 사실이 알려졌다.

설상가상 캐롯은 하마터면 PO 출전자격을 갖추고도 하마터면 봄농구 무대를 밟지못할뻔 했다. 캐롯은 KBL에 납부하기로 예정된 가입비 10억 원을 완납하지 못하여 PO 출전권 박탈위기에 몰렸다. KBL은 마감 기한내에 가입급을 완납하지 못하면 캐롯의 출전권을 박탈하고 7위팀이 대신 플레이오프에 나갈 수 있다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다행히 지난달 31일 마감기한을 코앞에 두고 가입금을 간신히 완납하면서 최악의 파행은 피했고, 캐롯은 무사히 창단 첫 PO에 나설 수 있었다.

이처럼 구단과 모기업은 연일 최악의 행보를 보였지만 정작 선수단은 악조건 속에서도 놀라운 투혼과 저력을 발휘하며 '신생팀 돌풍'을 일으켰다.

시즌 개막 전만 해도 캐롯은 전력상 약체 취급을 받았다. 전신 오리온 시절의 주축이던 이승현(KCC)-이대성(한국가스공사) 등이 모두 팀을 떠났고 높이의 열세(리바운드 34.4개 최하위)와 얇은 선수층이 약점으로 지목됐다. 김승기 감독조차 올시즌 성적에는 큰 기대를 걸지말라고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캐롯은 전성현-이정현을 중심으로 한 파격적인 '양궁농구(3점슛 11.5개/1위)'와 빼앗고 달리는 수비(스틸 7.4개/2위)를 앞세워 강팀들을 잡는 이변을 연출했다.

캐롯은 28승 26패로 5할이 넘는 승률을 거두며 정규리그 5위에 올라 일찌감치 자력으로 PO진출을 확정했다. 에이스 전성현(17.6점, 3점슛 3.4개, 3점 성공률 37.5%)은 시즌 후반 부상으로 주춤했지만 초중반까지는 'MVP급' 페이스를 선보이며 76경기 연속 3점슛 성공신기록-리그 베스트 5 수상 등을 달성했다. 2년차 이정현(15점, 4.2어시스트, 1.7스틸)도 김승기 감독의 조련 속에 리그 올스타급 선수로 빠르게 성장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전성현의 빈 자리를 메우며 에이스의 반열에 올랐다.

플레이오프를 앞두고도 캐롯을 향한 저평가는 이어졌다. 캐롯은 선수단 임금 체불에 PO 출전권 박탈 위기까지 몰리면서 선수들이 정규시즌 막판까지 맘편히 농구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여기에 정규시즌 중반 외국인 선수 데이비드 사이먼의 시즌 아웃-플레이오프를 앞두고서는 에이스 전성현의 돌발성 난청 부상 등 전력 면에서도 악재가 끊이지 않으며 전망이 밝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김승기 감독은 "회사 문제는 회사가 알아서 할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끝까지 다 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선수단을 다독였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밟게 된 봄농구 무대에서 캐롯은 또다른 기적을 연출했다. 6강PO무대에서 만난 정규리그 4위 울산 현대모비스를 상대로 캐롯은 최종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시리즈 대역전승이자 정규리그 순위를 뛰어넘는 업셋을 달성했다.

그리고 4강에서 만난 상대는 김승기 감독과 전성현의 친정팀이자 올 시즌 정규리그에서 단 한 번도 선두에서 내려오지 않고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차지한 최강팀 KGC였다. 김승기 감독은 KGC를 떠난 이후 여러 차례 친정팀을 저격하는 발언을 하다가 결국 항의를 받고 KBL로부터 경고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미묘한 관계가 된 두 팀의 대결은 '김승기 더비'로 불리기도 했다.

사실상 이 시리즈는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로 꼽혔다. 두 팀의 전력차가 큰 데다 캐롯은 6강에서 5차전까지 가는 혈전을 치르느라 이미 선수단이 방전될 대로 방전된 상황이었다. KGC의 우위는 명백했고 캐롯이 얼마나 선전할 수 있을지가 관심사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캐롯은 1차전부터 43-99로 완패하며 PO 역대 최소 득점, 역사상 최다 점수 차 패배라는 굴욕을 당했다. 2차전을 89-75로 잡아냈지만 다시 홈에서의 3, 4차전을 연달아 내줬고 최종전은 또다시 28점차의 완패로 어쩔 수 없는 전력의 차이를 절감해야 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캐롯이 어려운 상황에서 KGC를 상대로 1승을 거둔 것만도 대단하다고 평가한다. 캐롯은 3차전에서도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한때 KGC를 맹렬하게 몰아붙이며 선전했다. 이정현과 전성현은 체력적 부담과 잔부상을 안고도 끝까지 분투하며 진정한 투혼이 무엇인지를 보여줬고, 김승기 감독은 특유의 치밀한 지략과 끈끈한 경기운영으로 KGC에서의 성공이 단지 '선수빨'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캐롯은 올해 봄농구에서의 선전을 통하여 '감동 캐롯'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팬들은 최악의 조건을 딛고 여기까지 올라온 캐롯 선수들의 분전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김승기 감독은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고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한 시즌 동안 행복했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올시즌 캐롯의 돌풍이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조만간 구단이 다시 매각되어 데이원과 캐롯이라는 이름이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선수단의 선전과 별개로 데이원이 보여준 무책임한 행태는 프로농구계를 여러 차례 전례없는 파행위기로 몰아 넣었다는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과거에도 코리아텐더나 전자랜드 등 어려운 사정 속에 성과를 낸 구단들은 있었지만, 이들은 적어도 팬들과 농구계를 기만하지는 않았다. 데이원같은 사태는 프로스포츠에서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모기업은 바뀌어도 선수들은 남고 농구는 계속된다. 캐롯 선수단이 보여준 불굴의 투혼과 헝그리 정신은 자칫 막장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신생팀의 여정을 감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선수들은 더 안정된 구단을 만나 좋은 환경 속에서 팬들의 응원을 받으며 농구할 자격이 있다. 짧고 굵은 1년을 남기고 캐롯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겠지만, 다음 시즌에는 다른 이름표와 유니폼을 입고 만나게 될 선수단의 더 성장한 모습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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