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만난 사람]"성범죄 '2차가해' 단호히 맞서는 건 우리 모두의 임무"

서믿음 2023. 4. 20.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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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피해자' 저자 김재련 변호사
성범죄는 눈에 잘 띄는 않는 인권침해
무고·특정 의도 있나 의심 받기 일쑤
미투 사태엔 '진영' 장막 엿봬
피해자 당당한 삶 누리도록
성범죄 편견에 균열 내고파

성범죄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알리기 전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혹 직장을 잃지는 않을까’ ‘가족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 등의 염려가 신고를 머뭇거리게 한다. 피해 고발 이후의 상황도 순탄치 않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유독 엄격한 우리 사회는 ‘피해자다움’이란 잣대로 ‘완벽한 피해자’에 부합하는지를 되묻는다. 피해자는 또다시 자신이 피해자임을 입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는 그런 피해자들을 20여년간 변호해왔다.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피해자, 결혼이주여성, 아동학대 사건 변론을 1000건 이상 맡았고, 그중 600여건을 무료법률구조 활동으로 진행했다. 시작은 사법연수원 수료 직후 학교 선배와 일을 함께 일하면서부터였다.그는 법정에서 우리 사회에 남녀차별이 실존하고 폭력으로 고통받으면서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피해자들을 위한 법률구조 활동을 시작해 여성의전화와 가정법률상담소의 상담변호사. 한국성폭력위기센터 이사, 여성가족부 권익증진국장(개방직), 국가인권위 성차별조정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그리고 최근 책 ‘완벽한 피해자(천년의상상)’에 그간 보고, 듣고, 느낀 기록을 담아냈다. 그 내용을 지난 18일 김재련 변호사에게 들어봤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

-유독 성범죄 피해자는 온전한 피해자로 여겨져 위로받지 못하는 듯하다. 다른 범죄는 가해자가 지탄받는데 성범죄는 왜 끊임없이 의심받고, 피해자다움을 강요받을까.

▲범죄 피해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게 크다. 성폭력의 경우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한 것이 본질인데, 그 자유 침해 결과는 좀처럼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겉으로 봐서 멀쩡한데 도대체 무슨 피해를 입었다는 거야?"라며 피해를 의심받고, 더 나아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무고하는 거 아냐"라며 공격받기도 한다.

-그런 상황은 성범죄 피해를 입고도 머뭇거리는 이유가 될 것도 같다.

▲성폭력의 두려움은 2차 피해에서도 드러난다.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업무능력, 과거행적, 이성관계, 가족관계 등이 거론되며 2차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그간 우리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드러낸 사람이 당하는 무수한 2차 피해 상황을 목격했다. 그렇기에 정작 자신이 피해자가 됐을 때는 움츠러들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가족이 말리기도 한다.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폭로가 이어지면서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를 대하는 시각에 균열이 있었나. 현장에서 어떤 변화상이 엿보이며 개인적으로 어떻게 바라보나.

▲미투 폭로가 일으킨 사회적 반향을 보면서 한때 우리 사회가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각에 큰 균열이 발생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제 착각이었다. 성폭력은 ‘인간의 존엄’에 관한 문제보다는 진영논리로 이용됐다. 현직 여검사의 미투 폭로에 흰 꽃을 들고 지지 의사를 밝혔던 정치인들이, 같은 당의 도지사 성폭력에는 침묵했다. 서울시장이 가해자로 지목됐을 때는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으로 명명했고, 가해자의 죽음에 ‘님의 뜻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그들이 지킨 건 피해자가 아니라 ‘진영 논리’였다. 적어도 성폭력 사건에서는 진영 장막을 걷어내야 한다. 피해자가 서야 할 자리를 비틀어 놓은 정치인들이야말로 가장 주요한 2차 가해자들이다.

-책 내용을 보면 성범죄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입는 2차 피해가 크다. 수사관이나 법조인이 2차 피해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다만 그중 일부의 경우에는 긍정적 변화가 엿보이는 지점도 있는 듯한데.

▲현장 분위기는 많이 좋아졌다. 성인지감수성을 가지고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 인식이 높아졌다. 특히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를 대하는 수사관들의 태도가 많아 나아졌다. 대개의 사건이 그렇지만 특히 성폭력 사건은 전문성이 중요하다. 수사 초기 확보해야 할 증거는 무엇인지, 피해자 마음의 문을 열고 생생한 진술을 끌어낼 전문 역량이 필수적이다. 현재 성폭력 전팀이 있긴 하지만 수사관들이 형사팀, 경제팀, 여청팀(여성청소년팀)을 순환근무하면서 전문성을 쌓기 어려운 시스템이다. 이 점은 보완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그 외에 특별히 문제의식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편견이 깨졌으면 한다. 교통사고 피해자의 말은 들어줘도, 성폭력 피해자의 말은 ‘저게 뭐 자랑이라고 말하지’라고 비난한다. 피해자가 위축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건 그런 편견 때문이다. 그런 편견을 깨는 건 우리 공동체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다. 또한 2차 가해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상대로 목소리를 낸 후 벌어지는 2차 가해에 맞서는 건 피해자가 아닌 우리 공동체 구성원이어야 한다. ‘진영 논리’나 여타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은 상식을 가진 이들이 피해자 대신 목소리를 내줘야 한다.

-책에는 변호사로서 증거 자료 입수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내용이 나온다.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그만큼 공권력에 의한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인 듯도 한데.

▲증거를 확보해 죄인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게 수사관의 일이지만 수사관 한 명이 담당하는 사건이 수십, 수백 건이다. 현실적으로 녹록지 않기에 직접 뛰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변호사의 일은 수사관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료를 잘 씻어 요리해서 밥상을 차리려고 노력한다.

-그만큼 피해 입증이 관건인데, 성범죄가 무서운 건 가해자의 범죄 사실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오히려 피해자가 무고죄로 처벌받을 위험이 큰 것 같다.

▲악의를 갖고 상대를 허위 고소한 것이 아니라면 무고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사건 발생 장소에 왜 갖는지, 왜 가해자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는지, 신고가 늦었다면 왜 그랬는지를 잘 설명하면 된다. 설령 가해자가 무혐의 혹은 무죄판결을 받더라도 피해자가 바로 무고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간혹 정말 억울한 피해자가 무고죄로 처벌받는 경우가 있지만 이례적인 경우다. 무고가 무서워 위축될 필요는 없다. 사실을 사실대로 진술하면 된다.

-다만 실제로 상대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무고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런 경우 어떻게 분별이 가능한지.

▲피해자와의 대화, 증거 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피해자라고 해서 완전무결한 사람일 수는 없기에 편견을 걷어내고 사건 자체에 집중하는 편이다. 해당 사건에 관한 무결함을 전제한 것이지 생애 전체에 관한 판단은 아니기 때문이다. 극단적 사례지만 살인전과자라도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면 보호받아야 옳다. 다만 해당 사건에 관한 결점이 드러난다면 얘기가 다르다. 실제로 과거 사건 진행 중에 초기에는 파악되지 못한 내용이 드러나 의뢰인을 피해자로 간주하기 어려워지면서 사임을 한 적이 있다.

-피해자를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왔지만 때로는 가해자를 변호하기도 했다.

▲지인 등의 부탁으로 가해자를 변호한 적이 있다. 하지만 가해자를 변호한다는 것은 가해자의 ‘범행을 옹호’하는 것과 분명히 다르다. 그런 면에서 가해자의 편에 선 적은 없다. 피고인을 변론하면서 오히려 피고인이 피해자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는 부분은 교정해 주고, 피해자에게 불필요한 악감정을 갖거나 2차 가해를 하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증인신문에 있어서도 피해자가 상처받지 않도록 어투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재판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피해자의 2차 피해 방지 측면에서는 긍정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형사책임을 지고 난 후에는 기본적인 삶이 공격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 편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좋다고 했다.

▲천하의 몹쓸 사람들만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도 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고로 잘못에 상응하는 엄중한 형사책임을 부담했다면 출소한 이후 사회로 복귀할 길을 열어줘야 한다. 그 길 자체를 막는 건 옳지 않다. 그렇지 않을 경우 코너에 몰린 가해자들은 명백한 혐의조차 부인하고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런 분위기 때문에 피해자가 고소를 주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죄는 엄히 다스리되 반성하고 죗값을 치렀다면 다시 사회로 돌아오는 길을 봉쇄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를 안전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럼 피해자들도 마음 부담을 덜고 좀 더 빨리 법의 심판에 손을 내밀 거다.

-그런 점에서 가해자의 극단적 선택은 피해자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올 듯하다. 실제로 유력 정치인이 자신의 미투 사건이 드러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당시 자살은 최종적 가해라는 어느 소설의 말이 크게 회자된 바 있다.

▲무책임하고 비겁한 선택임에 분명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잘못의 시인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억울함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지지자들에게 잘못 해석되고 이용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정치인의 유족은 국가인권위원회를 상대로 고인의 성희롱 결정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1심 행정법원은 유족 청구를 기각하며 "잘못이 있으면 고치거나 스스로 돌아봐야 할 위치에 있음에도 피해자가 주장하는 피해에 관해 어떤 해명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문제 상황을 도피했고, 피해자의 피해를 철저히 외면했다"며 "이는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선택으로 볼 여지가 많고 망인의 사망 경위는 피해자 주장의 신빙성을 더해주는 정황으로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 책을 통해 기대하는 변화상이 있다면.

▲견고한 편견에 균열을 내고 싶다. 오프라 윈프리는 열네 살 때 친족 성폭력 피해를 입었지만 주변의 적극적 지지로 당당하게 학교 생활을 하고 지금은 유명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오프라 윈프리와 같은 상황을 찾아보기 어렵다. 독일 등에서는 초등학생이 성폭력 피해를 입게 되자 또래 친구들이 팀을 짜서 함께 등하교를 해줬다는 소식이 전해지는데, 우리나라는 가족마저도 피해 사실 공개를 꺼린다. ‘완벽한 피해자’를 요구받고, 그럼에도 합의도 해주지 않는 ‘가해자’가 되는 상황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또한 피해자들이 죽지 못해 겨우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살면서 언뜻언뜻 힘들었던 기억으로 주춤하는 나날들이 있을 뿐이다.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피해자의 보통의 삶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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