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명대사㊶] 퀸메이커, 어느 모자의 대화
가장 예쁘게, 어디에도 모난 데 없이 부드럽게 말하고픈 상대는 엄마에게 있어 자식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말로 자식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고, 자식에게 오해받고 싶지도 않다. 혹여나 자식이 엄마를 좋은 사람, 멋진 인간으로 생각해 준다면 태어난 보람을 느낄 정도로 기쁜 일이다.
동시에 고운 말을 주고받기 어려운 것도 자식이다. 사랑과 기대라는 이름을 붙여 자식에게 잔소리가 늘어지고, 물도 공짜가 아닌 세상에서 엄마의 사랑은 한없이 샘솟을 것처럼 가장 만만하게 말을 던지기도 한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 이어 넷플릭스라는 OTT(Over The Top, 인터넷TV)를 타고 세계적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마 ‘퀸메이커’를 보다가 인상 깊은 대화를 만났다. 나 홀로 청청, 깊은 감명이나 인생 교훈을 주는 명대사와는 다르다. 대화하는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역사 속에서 이뤄지는 ‘대화’가 심금을 울렸다.
그렇다고 교과서적으로, 모범 답안을 주고받듯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대화가 아니다. 다분히 이상적 대화일 수 있는데, 현실의 엄마와 아들처럼 배우 문소리와 박상훈이 어조와 감정을 잘 살린 것도 한몫했다.
엄마 오경숙과 아들 강현우의 대화가 유달리 깊이 다가온 것은 서로 곱게 말을 주고받으며 엄마와 아들 대화의 모범을 보여줘서가 아니다. 문지영 작가와 오진석 연출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엄마가 사회적 명분과 자식에 대한 사랑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엄마가 자식을 위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이 짧은 장면을 통해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엄마 오경숙은 인권변호사로 살아온 인물이다. 별명이 코뿔소일 만큼 타협 없이 직진하며 약한 자의 편에서 살아왔고, 그런 변호사가 많지 않다 보니 동분서주하느라 많은 부분 육아와 가사를 시인인 남편에게 의지해 왔다. 자칫, 엄마 오경숙보다는 인권변호사 오경숙의 비중이 인생에서 커 보이고, 부인-엄마 노릇을 등한시한 것으로 말하기 십상인 상황이다.
이럴 때, 아이가 학교폭력 가해자로 몰린 사건이 발생하면 흔히 ‘엄마의 부재’가 입방아에 오른다. 좋은 세상 만들겠다고, 인권에는 관심 없고 제 배 불리기에만 급급한 재벌 혼내 주겠다고 나돌아다니더니 정작 제 자식 교육 하나, 집안 건사 하나 제대로 못 했다고 비난받기 일쑤다. 누가 손가락질하기 전에 엄마 오경숙은 자책이 크다. 우리 아이가 아무 이유 없이 동급생을 때렸다고? 믿기지 않는 현실이지만, 입이 열 개라도 말할 수 없는 처지가 된 변호사 오경숙은 아들을 변호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심한다. 정치고 뭐고 자식에게 집중하자! 엄마 노릇 제대로 해보자!! 과연, 아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엄마: 이유가 뭐가 됐든 사람 때리는 거 나쁜 짓이야. 알지? 그래서 너 이렇게 벌받고 있는 거고. 근데 내가 너였어도 우리 엄마 얼굴에다 그런 이상한 사진 갖다 붙이고 합무로 놀려대고 그런 거 봤으면 못 참지. 그걸 어떻게 참니? 확 들이받지. (한숨…두 손으로 아들 손 잡으며) 다 엄마 때문이야, 미안해. 네가 엄마 때문에 이런 고생을 다 한다.
아들: (떨리는 목소리로) 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해?
엄마: 잘 들어. 엄마랑 싸우는 어른들이 선거에서 이기려고, 네 친구들 이용해서 너 화나게 하고 너 이렇게까지 만든 거래.
아들: (놀라는, 분노의 한숨)
엄마: 너무 잔인하지? 어른들 세상이. 엄마도 그런 놈들 너무 화가 나서 좀 제대로 혼내 주려고 버티고 버텼는데. (고개 가로저은 뒤) 이제 그만할 거야. 엄마 후보 사퇴할 거야. 너, 이 고생시키고, 엄마는 서울시장이고 뭐고 진짜, 진짜 관심 없다, 안 해.
아들: (엄마 손을 뿌리치며) 이제 와서?
엄마: 괜찮아, 어! 그래, 이제 와서라도 엄마 노릇, 좀 제대로 해볼란다. 왜, 못할 것 같아? (울먹이며) 엄마가, 엄마가 너를 낳았는데, 어, 엄마가 희생을 해도 모자란데, 네 인생을 엄마한테 어떻게 이렇게 희생을 시키니? 말이 되니?
아들: (두 손 불끈 쥔 채, 울먹이며) 누가 희생한대? 그냥 엄마가 (선거에서) 이기면 되잖아. 엄마가 관두면 나 같은 애가 계속 만들어질 거 아니야. 일단 이겨야 혼을 내든 갈아엎든지 할 거 아니냐고.
엄마: 현우야
아들: 나, 오경숙 아들이야. 시위 현장에서 태교했고, 인권운동 짬밥만 15년을 먹은 코뿔소 분신. 이런 데 잠깐 갇혀 있는다고 내가 쫄 거 같아? 어차피 엄마가 이겨서 나 꺼내줄 거잖아.
엄마: 현우아, 엄마, 엄마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야, 어? 선거에서 꼭 이긴다는 보장도 없고.
아들: (엄마와의 사이에 놓인 철창을 두 손으로 부여잡으며) 엄마 약속했지? 나 좋은 세상에서 살게 해준다고. 그거 하나 믿고 아빠랑 둘이서 지금까지 버텼는데, 이렇게 실망 시킬 거야? 저 나쁜 인간들이 만든 세상에서 엄마 아들 살게 할 거냐고!
엄마: 현우야! (흐느끼며) 엄마 안 울려 그랬는데, (아들의 팔을 손으로 치며) 너 왜 이렇게 엄마 울려, 어? (아들 목 뒷덜미를 쓰담으며) 미안하다, 우리 아들.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다’라는 말이 실감 나는 대목이다. 흔하고도 상식적인 엄마의 선택 앞에 혜안을 보여주는 건 되레 자식이다. 아들 강현우가 시청자, 우리를 향해 엄마를 위한 변호사이자 든든한 지원군으로 나섰다. 살기 좋은 세상 만들겠다고 다소 놓쳤던 자식 교육인데, 바로 그 자식이 ‘나는 괜찮다’, 아니 ‘그런 엄마의 아들이어서 더 단단해졌다, 엄마 마음먹었던 일 해라’라고 용기를 주는데, 제3자가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부모인 우리는 자꾸만, 없는 재산이라도 끌어모아 자식에게 남겨 주려 한다. 부모인 우리는 또, 내가 갔던 험한 길을 피하게 해주겠다는 명분 아래 자식에게 공부, 공부를 권하다 못해 강요한다. 정말 자식들은 그 바람대로 될까.
가장 좋은 부모는 어쩌면 돈 많은 부모도, 다양하고도 쓸모 있는 정보로 대학 진학의 길을 비추는 등대를 마련한 부모도 아닐지 모른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부모의 인생 그 자체로 보여주는 사람, 캄캄하고 어두운 세상의 길에서 부모가 앞서간 길을 따라 걸어도 되게 ‘좋은 사람’의 길을 내준 어른인 게 최고이자 최선일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게 한 ‘퀸메이커’ 속, 철창을 사이에 둔 모자의 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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