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땅에서 장애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이명옥 기자]
"어, 다리 다치셨어요? 걷는 게 불편해 보이네요."
같이 길을 걷다가 다리 이야기를 하면 나는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려 대답을 대신하곤 했다.
나는 왼쪽 다리가 불편한 지체장애자다. 50대 이후 난청이 심해져서 양쪽 모두 보청기를 사용하고 있다. 양쪽 눈 백내장 수술을 한 지는 이미 오래다. 한의사가 장애인 등록을 하고 복지카드를 발급받으라고 했을 때 나는 3년이나 망설였다. 장애인이라고 낙인을 찍는 것 같아 복지카드 대신 그저 다쳐서 잠시 다리가 불편한 것처럼 행세하려 했다.
보청기를 하기 전 지인들이 처음 보는 상대와 이야기를 할 때 친절하게 '이 분이 잘 못들어요' 하면 슬그머니 불편한 감정이 치솟아 오르곤 했다.
한 술 더 떠서 '명옥씨는 잘 못들으니까 괜찮아' 하면서 자기들끼리 깔깔거릴 때는 저 사람들이 내 지인이 맞나 싶어 화를 속으로 삭이곤 했다. 비교적 진보적인 여성들도 장애를 지닌 내게 어떤 상처가 될지 생각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자기들 편한대로 말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 수 있다.
▲ 책 <나에게 새로운 언어가 생겼습니다>. 장애여성이 몸으로 쓴 손바닥 에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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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부분의 장애여성, 특히 중증장애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몇 배의 어려움과 차별과 편견을 이겨내며 살아야함을 의미한다. 장애여성들은 언어 폭력, 물리적 폭력, 성폭력 등 온갖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가정과 사회에서 온갖 차별과 몰이해를 감내해야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정에서 최소한의 생존을 해결해주는 것 외에 아무런 기회를 마련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세상과 단절되어 갇혀지내며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다. 가족들이 장애아가 있다는 사실 특히 중증 여성 장애아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엄마 나이가 되었습니다'라는 첫 꼭지를 쓴 임은주는 소아마비로 중증 장애를 지닌 지체 장애여성이다. 6남매 중 넷째인 그이는 학교를 못 간 것은 물론이고 엄마에게 욕을 밥 먹듯이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장애로 인해 밥을 느리게 먹는다는 이유로 엄마가 화를 내면서 하던 말이라고 한다. 손님이 올 때마다 골방에 갇혀 지내야 했다는 그이는 친엄마가 돌아가시고 새로 들어온 새엄마한테서도 '다리XX이 어딜 돌아다녀 창피하게'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새엄마가 시설에 보내 세상과 만나는 기회를 얻었다. 더 이상 욕을 듣지 않아도 되었고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남편과 알콩달콩 산다.
"엄마는 내가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을 창피하게 여겼다. 손님이 오면 방안에 나를 숨겨두기를 반복했다. 작은방에 갇혀 문밖을 빼꼼히 내다보다 엄마한테 혼날 때도 있었다.
"뭣허냐? 병신다리 누가 보믄 어쩔라고 그려. 방으로 안 들어갈래!"
나는 깜짝 놀라 방문을 닫는다. 다시 문을 열고 엄마에게 쏘아붙인다.
"뭣하러 병신자식을 낳았어? 차라리 죽이지. 누구는 병신 되고 싶어서 되었어? 이렇게 방구석에 처박아놓을라믄 뭣하러 낳았어?" (13쪽)
그이는 여전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을 해보고 싶은 소원이 있다. 다른 형제 자매와 달리 학교 문턱을 넘어보지 못했고 글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남편의 짐이 되지 않으려고 건강을 열심히 챙기며 산다. 예쁜 옷도 사입고 외출때는 진한 립스틱도 바른다. 그이는 예쁜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이 꿈이다.
'두 번의 결혼, 하나의 사랑'을 쓴 국화는 오방장애인자립생활센터 상근활동가로 미술교실을 맡고 있다. 어릴 적 고열로 인해 뇌병변 장애를 지니게 됐다. 다행히 유복한 가정 환경, 든든한 방패막이 할머니의 사랑으로 잘 성장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한글도 가르쳐 주고 든든한 보디가드 역할도 해주셨기 때문이다.
대구대학교 서양학과에서 미술을 전공한 후 아이 한명이 딸린 중도 장애인을 만나 결혼을 했지만 친정에 끊임없이 돈을 요구해 해혼을 한다. 이후 2016년 같은 센터의 인권활동가인 다니엘을 만나 두 번째 결혼을 했는데 다니엘이 아파 걱정이 많다.그이는 계속 그림을 그려 언젠가는 개인전을 열 꿈을 지니고 산다.
우리는 장애를 선택하지 않았다
장애 여성들은 대부분 학교가 아닌 시설에서 처음 세상과 만나는 법을 경험한다. 시설에서 기본적인 생활을 익힌 뒤 탈 시설을 선택한다. 결혼을 하기도 하고 일을 하면서 독립적인 삶을 살기도 한다, 그녀들이 선택한 일은 대부분 장애인 인권교육, 장애인성폭력 상담 장애인 미술 교육 등 장애인과 함께하는 일들이다. 장애인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소통과 공감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애여성이라고 비장애여성들과 결코 욕망이 다르지 않다. 가슴 떨리는 연애와 사랑을 하고 싶어하고 사랑하는 사람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소소한 행복을 맛보며 살고 싶어한다.
무엇보다 자아실현을 위해 원하는 배움을 성취하고 사회적 관계망도 넓히고 자기들만의 버킷리스트를 실현해보고 싶은 열망이 가득하다.
"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했는데 읽을 수 있는 책이 없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학교에서 뭘 배웠어?"
나는 답한다."글 배웠어. 타자치는 연습. ㄱㄴㄷㄹ ㅏㅑㅓㅕ 계속 타자치는 연습했어. 기역 니은 디귿을 알고 아 야 어 오 요를 알지만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라."
대답하는 나도 답답하다.
(중략)
실로암장애인평생교육원에서 3년 동안 문해교육을 통해 글자 조합을 배웠다. 이제 나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다. 내 연필은 휴대폰이다.글이 보이기 시작하니 하고 싶은 말도 많아졌다." - 본문 중
새로운 언어가 생기고 새로운 버킷리스트 목록이 생긴 7명의 자랑스러운 장애여성들 아니 이땅의 모든 장애여성들이 당당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은 장애/비장애를 떠나 인간으로서의 삶과 존엄을 지켜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장애여성들은 '장애를 선택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뇌리에 박히며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렇다, 장애여성 그 누구도 장애를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작년에 사이버대학교 휴먼학부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해 장애인복지론, 여성복지론을 부지런히 공부하고 있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며 나는 새로운 꿈을 꾼다.
장애여성들이 새로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사다리가 되어 함께 손잡고 길을 만들어 가는 행복한 꿈을. 나는 장애를 선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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