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우병은 희귀질환계의 당뇨병… "관리하면 오래 살아"

이해림 기자 2023. 4. 20. 09: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0.001%의 싸움]②혈우병
혈우병은 혈액응고인자제제를 주사 받으며 관리할 수 있는 희귀질환이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우리는 아프면 병원을 가고, 약을 받아 복용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당연한 일이 어렵다. 너무 아프지만 약이 없고, 약이 있다는데 쓸 수 없다. 희귀질환자들의 이야기이다. 세계 희귀질환 유병률은 10만 명당 1.2명으로 추산된다. 0.001%의 확률로 온 질환이지만, 희망을 놓긴 이르다. 전 세계 제약사가 희귀질환 치료제 개발을 위해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투자하고, 결과물이 하나 둘 등장하고 있다. 정부도 적극적으로 희귀질환 치료를 지원하겠다고 한다. 희귀해서 소외받았던 희귀질환의 정체와 환자들의 현실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피가 멎지 않는 병’ 대부분 사람은 혈우병에 대해 이 정도만 알고 있다. 이보다 조금 더 아는 게 ‘모계로 유전돼 남성에게만 발병하는 병’ 정도다. 희귀질환의 일종이긴 하나, 혈우병은 생각만큼 막막하기만 한 병이 아니다. 오히려 희귀질환 중에서는 치료 경과가 좋은 편에 속한다. 혈우병은 어떤 병이며 어떤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지, 혈우병의 이모저모를 톺아본다.

◇혈우병, 혈액응고인자 활성도 낮아 지혈 더딘 희귀질환
혈우병은 혈액응고인자가 부족해 출혈이 잘 멎지 않는 희귀질환이다. 혈우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아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25~30%는 가족력 없이 돌연변이로 발생한다. 본인의 혈액응고인자에 대한 항체가 생겨버려, 혈액응고인자가 있어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후천성 혈우병’도 드물게 있다. 그러나 이는 거의 노인에게 나타나는데다 치료받은 환자 대부분이 정상화된다. 태어날 때부터 혈액이 제대로 응고되지 않아 평생 관리해야 하는 선천성 혈우병과는 다르다.

혈우병은 부족한 혈액응고인자의 종류와, 부족 정도에 따라 유형이 나뉜다. 8번 혈액응고인자가 부족하면 혈우병 A, 9번 혈액응고인자가 부족하면 혈우병 B, 11번 혈액응고인자가 부족하면 혈우병 C로 분류된다. 혈우병 환자 자체가 드물지만, 그중에서도 혈우병 C는 환자가 거의 없는데다 A ·B유형만큼 치명적이지 않다. 혈우병 환자의 80%가 혈우병 A, 20%가 혈우병 B에 해당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세브란스병원 소아청소년과 유철주 교수는 “정상인의 혈액응고인자 활성화 비율이 50~150%라 치면, 혈우병 환자의 응고인자 활성도는 경증에서 5~40%, 중등증에서 1~5%, 중증 에서 1% 미만에 불과하다”며 “응고인자 활성도를 최소 1% 이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혈액응고인자를 인위적으로 몸속에 주입하게 된다”고 말했다.

혈우병 환자는 병과 함께 태어나 늙어간다. 국내 저명한 혈우병 전문가들이 대부분 소아혈액종양을 전공한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인 이유다. 인하대병원 소아청소년과 박정아 교수는 “기거나 걷기 시작하며 여기저기 잘 부딪히는 영아기에 혈우병을 처음 진단받는 게 대부분”이라며 “부딪히거나 예방접종을 받은 부위에서 피가 멎지 않으면 혈종(피떡)이 생기는데, 이때 혈우병을 의심하고 혈액검사로 병을 확진한다”고 말했다. 유철주 교수는 “혈우병 환자는 관절, 연부조직, 근육 내에 출혈이 잦으며, 질환 특성상 지혈이 어려우므로 대뇌, 복강 내, 장에 출혈이 발생할 경우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주사 맞는 게 힘들어도… “고혈압·당뇨처럼 관리 가능” 
혈우병은 희귀질환치고 희망적인 축에 속한다. 박정아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당뇨병이나 고혈압처럼 관리하며 살 수 있고”, “수명도 일반인과 다르지 않아서”다. 혈우병 환자들은 몸무게가 실리는 무릎과 발목 관절에 출혈이 잦다. 그러나 부족한 혈액응고인자를 주기적으로 주사 받으면 가벼운 운동도 할 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주사를 다시 맞아야 하는 시기가 금세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몸속에 넣어준 혈액응고인자가 또다시 바닥나서다. 박정아 교수는 “일반적인 혈액응고인자제제를 쓰는 혈우병 A 환자는 1주에 3번, 혈우병 B 환자는 1주에 2번 정맥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말했다. 손등, 팔목 등에서 정맥을 찾아내 주삿바늘을 꽂아 넣는 게 정맥주사다. 피하지방층에 약을 투여하는 피하주사보다 주삿바늘을 깊게 찔러야 한다.

아직 어린 혈우병 환자들은 주사를 맞는 매 순간이 고역이다. 정맥에 주삿바늘을 자주 꽂다 보면 나중엔 혈관이 안으로 숨는다. 주사를 놓아야만 함에도 놓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이에 1~5세 환자나 중증 혈우병 환자는 심장 가까이 있는 굵은 정맥에 ‘케모포트’란 기구를 삽입하기도 한다. 혈액응고제제를 주사기로 투여하지 않아도 되게 일종의 ‘약물 투입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좋은 선택지 같지만, 환아의 부모로선 선뜻 수술 결정을 하기가 어렵다. 케모포트를 삽입·제거할 때 전신 마취가 필요해서다. 유철주 교수는 “케모포트를 삽입한 후엔 기구를 통해 감염되는 일이 없도록 의료진과 부모님이 위생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며 “관리를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면 추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행히도 주사 투여 횟수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엔 몸속에 들어온 혈액응고인자가 줄어드는 데 걸리는 시간(반감기)을 늘린 주사제가 개발됐다. 바로 ▲사노피-아벤티스코리아의 ‘엘록테이트’(혈우병 A, 8번 혈액응고인자제제) ▲다케다제약의 ‘애디노베이트’(A, 8번) ▲사노피의 ‘알프로릭스’(B, 9번) 등의 ‘반감기연장제제’다.​ 유철주 교수는 “8번 인자 반감기연장제제는 일주일에 2번, 9번 인자 연장제제는 일주일에 1번만 맞아도 출혈이 예방된다”고 말했다. 일반 주사제와 비교하면 한 주에 한 번 주사를 덜 맞아도 되는 셈이다.

역시 반감기연장제제 중 하나인 로슈의 ‘헴리브라’(혈우병 A)가 급여 확대 수순을 밟고 있는 것도 반길 만하다. 헴리브라는 원래 8번 응고인자제제에 항체가 생긴 환자에게만 급여가 적용됐다. 혈액응고인자제제를 투여받는 환자 일부는 응고인자를 제거하는 항체가 생겨, 약을 맞아도 응고인자 활성도가 높아지지 않는다. 헴리브라는 8번 인자와 비슷한 혈액 응고 효과를 내지만 8번 인자는 아닌 성분으로 구성됐다. 항체 보유 환자에게도 효과가 있어 이들에게 급여가 우선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비항체 환자 역시 헴리브라가 간절하다. 정맥주사가 아닌 피하주사로 맞을 수 있는 데다, 반감기가 최대 4주에 달하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주사를 맞으면 된다는 뜻이다. 급여 제한 탓에 비항체 환자들은 헴리브라를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난 2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헴리브라 급여를 비항체 환자로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박정아 교수는 “항체가 없는 중증 혈우병 환자에게 올해 상반기부터 헴리브라 급여 투여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며 “급여 적용에 관한 세부기준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비항체 환자에게도 급여가 확대될 예정인 헴리브라./사진=JW중외제약
◇환자 삶의 질 높이려면, ’신약 도입’ ‘인식 개선’ 원활해야
투여받기 쉬운 약이 치료 현장에 도입되면 환자의 삶이 달라진다. 이에 혈우병 치료제 개발은 반감기가 길고, 투여하기 쉬운 약제를 개발하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개발 극 초기 단계라 아직 임상시험조차 진행되지 않았긴 하나, 알약처럼 복용하는 경구용 치료제를 만들려는 시도도 있다. 박정아 교수는 “로봇 알약 ‘라니필(RaniPill)’을 응용한 경구용 약물이 개발되고 있다”며 “기술이 발전되면 언젠가는 개발에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작은 주사 로봇 라니필이 탑재된 알약을 삼키면, 이 로봇이 환자의 몸속 장기로 들어가 약물을 주사하는 원리다.

부족한 혈액응고인자가 몸에서 직접 만들어지게 하는 주사제도 개발돼있다.▲바이오마린의 ‘록타비안’(A, 8번) ▲CSL베링의 ‘헴제닉스’(B, 9번) 등의 ‘유전자 치료제’다. 미디어에 홍보되는 것처럼 ‘생애 한 번만 맞으면 되는 혈우병 완치제’는 아니지만, 반감기연장제제보다 효과가 오래가는 건 사실이다. 박정아 교수는 “헴제닉스는 한 번만 맞아도 9번 인자 활성도가 약 5% 수준에서 7년 이상 유지됐으며, 록타비안을 투여한 환자 75.4%에서 8번 인자의 활성도가 5%정도로 2년 이상 유지됐다는 보고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들 약이 국내에 급여 도입되긴 어려워 보인다. 유철주 교수는 “록타비안은 가격이 20~30억 원대, 헴제닉스는 30~40억 원대로 높게 책정된데다, 혈우병 A·B 환자들이 쓸 수 있는 다른 약이 이미 국내에 있으므로 급여화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말했다.

환자들이 신약을 사용해볼 수 있게 보험 급여 규정을 유연하게 하는 것 외에도, 혈우병이란 질환 자체의 인식 개선이 절실하다. ‘절망적인 희귀질환’이 아닌, ‘빨리 진단해 관리해나가면 되는 병’으로 말이다. 혈우병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도 제고돼야 한다.

유철주 교수의 환아 중 한 명은 ‘아동폭력 피해자’로 분류돼 부모와 분리조치된 적 있었다. 질환 탓에 몸 곳곳에 생긴 멍 때문이었다. 처음엔 부모도 자녀가 혈우병인지 몰라 몇 개월간 아이를 ‘빼앗겼으나’, 혈우병 진단이 나온 후 아이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유철주 교수는 “인지도가 낮은 희귀병 특성상 환자와 가족들이 편견의 대상이 되기 쉽다”며 “특히 혈우병이 모계로 유전되는 경우가 많아 환자의 어머니가 죄책감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어머니가 보인자가 아니어도 유전적 돌연변이 탓에 혈우병이 생길 수 있으니 너무 죄의식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Copyright © 헬스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