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는 내 숙명... [종이달] 김서형은 오늘도 꿈을 꾼다
Q : 드라마 〈종이달〉에서 VIP 고객의 돈을 빼돌리며 파국에 이르는 여성을 연기해요. 공개된 이미지들을 보면 마음이 메말라버린 여자의 얼굴이던데요.
A : 높고 견고한 울타리 속에 갇힌 여자예요. 결혼을 택하면서 ‘주체적인 나의 정체성이 여기까지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여자. 하지만 그 안에는 자유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죠. 남을 도우려는 심성과 책임감이 있고요. 그래서 돈이 원래 위치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횡령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이를테면 조선시대 의적처럼.(웃음)
Q : 입체적인 인물이네요.
A : 그래서 홍보할 때 어떤 여자인지 설명하는 게 참 어려워요.(웃음) 원작을 6년 전에 처음 보고 ‘이건 진짜 내가 해야만 하는 역할이야’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하니 쉽지 않더라고요. 스스로 파국으로 가는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시청자들이 응원할 수 있을지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Q : 자신이 만든 울타리를 박차고 나와, 파국으로 치닫는 여자. 저는 그것만으로도 〈종이달〉이 보고 싶어져요.
A : 다행이네요.(웃음) 결국 한 여자가 자유를 갈구하고, 가능성을 탐구하고, 자신의 만능감을 시험해보는 이야기예요. 파국이 올 걸 알면서도, 내가 무너지는 걸 알면서도 발을 들이는 건 그 때문이죠.
Q : 불에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A : 맞아요. 만능감에 도취돼 나 스스로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선의와 악의를 동시에 가졌죠. 제가 여태까지 연기한 어떤 악역보다 자기 자신에게 악한 사람이에요.
Q : 작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네요.
A : 사실 6년 전 일본 영화 〈종이달〉을 보자마자 판권을 산 사람이 있는지부터 수소문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 서사를 다룬 작품이 많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다시 드라마화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거죠.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계속 〈종이달〉을 응원하고 있었는데, 제게 출연 제안이 들어왔을 때 너무나 놀랐고 기뻤어요. 애정이 남다르죠.
Q : 인스타그램에서 기타 연주하는 포스팅을 봤어요.
A : 고등학교 때부터 쳤어요. 어릴 때 수학여행이나 MT를 가면 모닥불 앞에서 기타 치는 선생님, 너무 멋있잖아요? 혼자 띵까띵까 하는 걸로는 안 늘어서 최근엔 학원을 다니고 있어요. 매일 세 시간씩 연습하죠. 기타를 치면 안정감이 들고, 내 안의 서정성을 잊지 않게 해서 좋아요. 요새 기타가 제 낙이에요. 최근 혁오의 ‘톰보이’를 맹연습 중입니다. 나중엔 일렉 기타를 치고 싶어요.
Q : 일렉 기타를 치는 김서형이라니, 가슴이 뛰네요.
A :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음악을 정말 좋아하는데요, 그들의 음악을 잘 연주해보는 게 지금의 목표입니다. 누가 알아요? 마음 맞는 사람끼리 두세 명 모여 밴드를 할지.
Q : 김서형에게 행복이란 뭔가요?
A : 거창한 말은 모르겠어요. 단지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좋을 뿐이에요. 기타를 치고, 연기를 하는 것, 하고 싶은 모든 것은 제 꿈이죠. 다만 연기라는 꿈을 이뤄가는 건 지금도 쉽지 않아요. 늘 책임감과 성실함으로 부단히 애쓰며 나를 깎아서 이루고자 해요.
Q : 연기는 당신에게 숙명인가요?
A : 맞아요. 저는 이 숙명을 다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책임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요.
Q : 예전 인터뷰에서 “나는 연기와 결혼했다”라고 말한 것, 기억하시나요?(웃음)
A : 숙명이니까.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 존재해야 하는 이유, 내가 나로 태어나 존재의 의미를 찾을 때, 거기에 연기가 있었어요.
Q : 김서형의 프로페셔널함은 어디서 드러나나요?
A : 주어진 것에 성실함과 책임감을 다한다는 신념.
Q : 어느덧 데뷔 30주년입니다. 1994년 KBS 공채 탤런트로 시작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 것 같나요?
A : 그런 얘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너무 창피해요.(웃음) 저는 여전히 연기를 알아가고 싶은 사람인걸요. 데뷔 30주년, 이런 거 사실 모르겠어요. 〈종이달〉을 하면서 이렇게 연륜이 쌓이고 경력이 쌓여도 여전히 너무 어렵다는 걸 느껴요. 소위 “짬에서 오는 바이브”라는 말을 하는데, 저는 그 말이 싫어요. 그걸 뛰어넘고 싶으니까요. 전 매 순간 뻔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기에 끊임없이 분석하고 노력하고 발전하려 하죠. 누군가는 자리를 보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하지만, 저는 늘 저 자신을 뛰어넘고 싶거든요. 제 꿈은 늘 ing예요.
Q : 그런 열정은 어디서 샘솟나요?
A : 사람들이 제 연기를 보고 ‘실제로 이런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어딘가에 있을 전문직 여성,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멋진 어른, 그런 인물에 숨을 불어넣어주는 걸 배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더 발전하고 싶은 거죠.
Q : 멋지네요.
A : 멋있는 얘기를 하려고 한 건 아녜요.(웃음) 저도 얘기를 뱉으면서 또다시 저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거예요. 다짐하듯이.
Q :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있나요?
A : 책을 볼 때, 제가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연기 톤까지 다 그려지는 작품이 있어요. ‘내가 벌써 연기하고 있네’라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는 너무 흥분이 돼서 그 작품을 택하게 돼요. 사실 꼭 애정이 가는 책만 택하게 되는 건 아녜요. 왜냐하면 저도 삶이 있고 의식주를 영위해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제가 늘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아니잖아요. 직업 배우로서 솔직한 말이죠.
Q : 이제야 말이지만, 드라마 〈마인〉을 보고 소름 돋았어요. 4년 전 저와의 인터뷰에서 오래전부터 퀴어 영화를 하고 싶었다고, 남편이 있는 여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를 해보면 재미있겠다고 했는데 그게 그대로 이뤄졌더라고요.(웃음)
A : 제작진이 그 인터뷰를 봤던 게 아니었을까요?(웃음) 속에 담아두는 것보단 뱉어야 사람들이 알아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18년 전 〈씨네21〉 인터뷰에서도 “퀴어 영화 하고 싶어요”라고 하고 다녔죠. “아, 아직도 멀었나 한국은…” 이러면서.(웃음) 저는 늘 열려 있고 많은 걸 멀리 봐요. 하나하나 이뤄지고 있다는 게 기쁘네요.
Q : 팬들 사이에 “미국에 케이트 블란쳇이 있다면 한국엔 김서형이 있다” 밈이 있는 거 아시나요? 서로 영업하고?
A : 아니,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은 있는데 그렇게 서로 영업을 한다고요?(웃음) 언젠가 블란쳇을 만나면 꼭 얘기해줘야겠네. 저도 정말 좋아하는 배우예요. 이거, 애국하는 건가?(웃음)
Q : 2030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사라져버리는 배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김서형은 차근차근 한 계단씩 밟아 나가며 중년의 나이에 원톱 주연으로 우뚝 선 케이스입니다. 근사하게 나이 든, 지구력 강한 배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나요?
A : 살아야 하니까. 꿈밖에 꾸는 게 없으니까. 지난해 제가 1년 반 동안 네 작품을 연달아 했거든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좋았어요. 저는 늘 목마르거든요. 김서형이라는 이름 석 자에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Q : 권위와 힘이 있는 캐릭터를 자주 해왔죠. 사람들은 배우 김서형에게서 강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A : 제가 강한 역할들을 잘해내왔으니까, 사람들이 그에 대한 믿음이 있는 거죠. 늘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죽을 듯이 열심히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멋진 보상이라고 생각해요.
Q : 김서형은 멋져요. 반삭을 하고 브라렛 차림으로 칸에 등장했을 때, 멋있다는 말이 절로 나왔죠. 당신은 어떤 걸 멋지다고 생각하나요?
A : 음… 어려운 질문이네요. 어릴 때부터 엄마가 너는 왜 이렇게 ‘사내아이’처럼 입냐고 했었죠. 칸에서는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애티튜드와 스타일이 있었어요. 〈아는 형님〉에서는 치마 교복이 불편해 보여 바지 교복을 입고 나간 거고요. 저의 멋이라고 하면 스타일보다는 연기에 대한 꾸준함에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연기를 꾸준히 하고, 꾸준히 꿈꾸는 것. 변함없는 게 제 멋이에요.
Q : 연기의 영감은 어디서 받나요?
A : 저는 알 수 없는 상상을 많이 해요. 어디든 많이 걷고 많이 관찰해요. 집 근처에 있는 오래된 재래시장을 혼자 터덜터덜 다니길 좋아하는데요, 시장에서 붕어빵 파는 분, 상점을 오가는 사람들을 구석구석 살펴보죠. 이를테면 시장조사랄까요.(웃음)
Q : 인스타그램을 보면 깜짝 놀랄 만큼 여성 팬이 많습니다.
A : 오랜 팬들이죠.(웃음) 전문직을 많이 하면서 사회 활동하는 멋진 여성의 모습을 많이 보여준 게 큰 이유 아닐까요? 저도 항상 이런 멋진 여성이 있기를 바라며 연기하곤 하니까요. 저 또한 사회 초년생 친구들의 마음으로 그 캐릭터를 공부하죠. 요새 저는 멋진 것 이상의 아름다움을 얘기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Q :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고민하는군요.
A : 알아가고 있죠. 알아야 하고. 드라마 〈아무도 모른다〉를 촬영할 때는 ‘좋은 어른은 뭐지’라는 질문에 빠져 있었어요. 나도 좋은 어른일까 돌아보면서요. 무엇이 아름다운지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지만요.
Q :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은 여전한가요?
A : 하하. 사소한 것이에요. 다친 고양이를 보면 꼭 병원에 데려가고, 옆집 아이가 많이 울면 걱정돼 관리사무소에 얘기하는 것 같은. 하지만 이런 것들은 너무 당연한 것이니까요.
Q : 저번 인터뷰에선 강릉에 살던 어린 시절엔 시를 읽던 내성적인 학생이었다고 말했죠. 그때의 김서형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A : 봄이면 개나리가 많이 피는 동네였죠. 저는 그때의 김서형과 지금의 김서형이 여전하다는 것에 감사해요. 저는 지금도 소녀거든요.(웃음) 해주고 싶은 말은, 너는 한결같을 거야. 변하지 않을 거야, 여전히 소녀일 거야.
Q : 시대가 바뀌며 다양한 여성 서사들이 이전보다 풍부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좋은 변화를 체감하나요?
A : 여전히 부족해요. 한참 쏟아지다가 잠깐 머뭇대더니 최근엔 정체기가 온 것 같아요. 저는 대중은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보다 항상 먼저 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OTT가 이렇게 잘됐고, 유튜브 채널들이 활성화됐죠. 결국은 그 작은 것들이 큰 채널들을 움직이게 하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제작자들은 오히려 대중보다 주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18년 전부터 퀴어물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이제야 조금씩 퀴어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나오듯이. 주저하지 말고 앞서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Q : 꿈꾸는 소녀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A : 세상은 급변하고 있어요. 인생의 주체가 돼서 격동하는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이냐, 질문을 던질 때 그 돌파구는 늘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돌파력을 키우세요.
Q : 김서형은 무엇을 믿나요?
A : 저는 태어나 제 앞에 놓인 것에 충실해요. 우리 모두는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 하죠. 결국은 그 충실함의 반복입니다. 저는 그 힘을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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