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익의 Epi-Life] 강릉 커피가 인생 커피인 이유

서지영 2023. 4. 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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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젊었을 때에는 강릉 하면 오죽헌이었습니다. 경포대였습니다. 순두부였습니다. 지금은, 강릉 하면 커피입니다. 젊은이들이 강릉에 커피를 마시러 갑니다. 커피 도시 강릉입니다.

강릉이 커피 도시가 된 데에는 박이추라는 유명 바리스타가 서울을 떠나 강릉에 진을 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커피 마니아는 박이추가 서울을 떠나 굳이 강릉으로 간 이유가 궁금하여 일부러 그곳을 찾아 커피를 마시고 인터넷에 방문 후기를 남기곤 했었지요.

“강릉 가면 커피”라는 커피 마니아의 공식이 자리를 잡을 즈음에 ‘커피 테마 파크’인가 싶을 정도로 크게 지은 카페가 강릉에 개업을 하여 “강릉 가면 커피”라는 공식을 대중화하였습니다. 심지어 강릉 바닷가 자판기 커피까지 떴었지요.

강릉 커피가 여느 지역의 커피보다 더 나은 무엇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강릉은, 아니 우리나라는, 커피 산지가 아닙니다. 강릉에 소재한 카페들이 어디서 특별난 원두를 따로 확보하여 공수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커피 가공과 관련하여 특별난 기구나 기술을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다들 강릉 가서 커피를 마시는 일을 특별나게 여깁니다.

강릉 커피 축제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강릉 커피가 특별난 이유를 찾아내어 강릉에 사시는 여러분에게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강릉 커피를 열심히 ‘관찰’한 적이 있습니다. 커피나 카페에 대한 관찰은 의미가 없었고, 강릉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에게서 뭔가 특별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제가 관찰하기로는, 강릉 커피가 여타 도시의 커피와 다른 점은 바닷가 바로 옆에서 마신다는 것입니다. 강릉의 카페들은 대부분 바닷가에 있습니다. 바다를 보면서 커피를 마십니다. 시각적으로 커피를 더 맛있게 만들기도 하지만, 더 결정적인 것은 바다 향입니다. 바다 향이 커피 향에 더해지고, 그러니 강릉에서 마시는 커피는 특별난 커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강릉 안목해변의 조형물. 산불에도 바다와 모래해변은 여전하다.

바닷가에 가면 여러분은 어떤 행동부터 하십니까. 다들 숨을 깊이 들이마십니다. 맑은 바다의 향을 만끽하려고 그러는 것이지요. 바다 향만으로 사람들은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집니다. 그래서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에 이 말이 자동으로 발사됩니다. “아, 좋다.” 이건 거의 본능입니다.

자, 커피를 마실 때에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고, 우리 한국인은 커피를 마실 때에 대체로 숨을 크게 쉽니다. “쓰읍~” 하고 커피와 함께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이내 “하~” 숨을 내뱉습니다. 커피를 마시며 한숨을 쉬는 것일까요. 그 큰 숨으로 무엇을 얻는 것일까요.

큰 숨은 긴장을 풀어줍니다. 긴장을 풀 때의 큰 숨은 신세한탄의 한숨과는 다릅니다. 큰 숨 다음에는 기운이 돋습니다. 세상이 조금 밝아 보입니다. 낙관의 숨입니다.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세상을 낙관합니다. 바닷가에서 우리는 세상을 낙관합니다.

바닷가에서 커피를 마시면 ‘바닷가에서의 큰 숨’과 ‘커피 마실 때의 큰 숨’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몸에 바다 향과 커피 향이 뒤섞여 들어옵니다. 낙관에 낙관이 더해져 희망이 움틉니다. 평소에 마시던 커피와는 전혀 다른 커피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에스엔에스에 “강릉에서 인생 커피를 마셨다”는 글이 유독 많은 이유입니다. 강릉의 그 바닷가에서 마신 것은 커피가 아니라 거친 세상을 버티어내는 희망이었던 것이지요.

강릉 경포대 인근이 불타는 것을 텔레비전으로 보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솔숲이 타는 것도 보았습니다. 보면서, 강릉에 사람들이 안 오면 어떡하나 싶었습니다. 성수기에 관광객이 안 오면…. 관광객이 퍽 줄었다는 뉴스를 봅니다.

복구를 서둔다지만 당분간 산불 흔적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다와 모래해변까지 불탄 것은 아닙니다. 그 큰 산불에도 강릉은 여전히 아름다운 해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소 우리에게 “인생 커피”로 희망을 주었던 강릉에 희망을 되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틈을 내어 강릉의 맑은 바다 향이 담긴 커피를 마시러 가야겠습니다.

 
명예강원도민 맛칼럼니스트 황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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