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도 게임 좋아해요 [게임할 권리①]
“충현이에게 장애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아이는 가만히 앉아 TV만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이기고 경쟁하고, 성취감을 얻는 것들이 게임 안에서는 가능해요. 조금만 도와주면 장애인들에게도 의미 있는 시간을 선물할 수 있어요.”
뇌성마비 장애인 이충현(23) 군의 취미는 게임이다. 그는 하루에도 몇 시간씩 비디오 게임기 ‘위(Wii)’와 엑스박스(Xbox)를 이용해 게임을 즐긴다.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야구와 골프, 볼링 등의 스포츠 게임과 레이싱 게임이다. 게임을 하고 나면 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몸이 불편해 개조한 컨트롤러와 여러 보조기구에 의존해 게임을 하는 그에겐, 게임 한 판 한 판이 거친 운동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군은 지친 기색도 없이 거듭 컨트롤러를 잡고 게임을 즐긴다.
‘자조모임’이 그에게 게임의 재미를 가르쳐줬다. 자조모임은 2년 전 국립재활원이 약 10개월 간 진행한 프로젝트다. 뇌병변 장애인 다섯 명이 가족, 게임, 치료, 교육, 심리전문가와 주기적으로 모여 장애인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자신에게 적합한 비디오기기와 보조기기 등을 찾은 이 군은 더 많은 게임을 스스로 즐길 수 있게 됐다. 더불어 친구들과 게임을 하는 재미도 알게 됐다. 이 군의 어머니 박은경(52)씨는 “가족들이 게임을 전부 좋아한다. 충현이 손을 잡고 게임을 도와줬을 땐 좀처럼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충현이 스스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환경과 상황을 만들어줬더니, 지치지도 않고 게임을 즐기더라”고 전했다.
압박 붕대로 컨트롤러를 묶고 발 고정 스트랩을 하는 등의 고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이 군의 바람은 더 많은 게임을 플레이 하는 것이다. 200여 종이 넘는 위 게임 가운데, 몸이 불편한 그가 플레이 할 수 있는 게임은 현재 10여 종에 불과하다. 박 씨는 기자의 노트북을 가리키며 “기자님에게는 노트북이 재미있는 기기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아이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물건이다. 그런데 여기에 스위치 하나만 연결하면 아이에게 즐거움을 주는 의미 있는 것이 된다. 환경을 조금만 바꿔주면 된다”라며 장애인 게임 접근성 문제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
색약 모드 지원도 손에 꼽을 정도… 국내 장애인 게임 접근성 인식은 바닥
지난 1월 정부 발표에 따르면 국내 비장애인들의 41%(평일), 32%(주말)는 여가 활동으로 게임·인터넷 검색을 즐긴다. 반면 장애인들은 각각 18%, 15%에 그친다. 2019년 한국콘텐츠진흥원(콘진원) 조사에 따르면 전국 특수학교 학생 게임 이용 비율은 44.6%로, 국민 평균인 70%를 크게 밑돈다.
시중의 국내 게임 대부분이 장애인들에게 불친절하기 때문이다. 이 군과 같이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기 힘든 장애인들을 위한 게임 옵션 제공, 보조기구의 개수와 다양성도 떨어지지만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 등을 위한 이용자 인터페이스(UI) 및 이용자 경험(UX)도 없다시피 하다. 기본적인 색약모드 조차 지원하지 않는 게임이 대다수다.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국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문화와 여가를 향유 할 권리마저 누리지 못하는 셈이다.
몇몇 국내 게임사가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연구와 노력을 지속하고 있지만 아직은 걸음마 단계다. 그간 본질인 시스템을 개선에 집중하기 보다는, 게임 문화 행사를 제공하는 등 사회 공헌 사업의 일부로만 문제를 바라봐서다. 박 씨는 “드래그(drag)를 해야 하는 게임들이 많다. 게임 재미를 위해서라지만, 장애인 입장에서는 드래그를 하기가 정말 어렵다. 그냥 터치만 하는 걸로 변경이 가능한지 게임사에 문의 했는데 안 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토로했다.
해외는 사정이 다르다. 2004년 설립된 미국의 비영리 기구 에이블 게이머 재단은 장애가 있는 게이머들이 게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특히 ‘게임 이용 접근성 향상을 위한 실질적 지침’을 지속적으로 발표, 게임 개발자들이 개발 단계에서 고려할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소니는 장애인 커뮤니티와 협업해 자체 접근성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한편, 장애인을 위한 전용 컨트롤러를 속속 개발 중이다. 유비소프트, 캡콤 등 글로벌 게임사들은 인터넷 홈페이지 등에 중증도와 장애 종류에 따른 구체적인 게임 접근성 설정을 안내하고 있다.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게임문화를 연구하는 도영임 교수는 “우리나라 게임사들은 게임을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자산, 즉 사회적 자본으로 보지는 않았다”고 분석했다. 사회적 자본은 사람들 간 상호작용과 협력 방식에 영향을 미쳐 개인 혹은 집단에 이익을 주는 ‘무형의 자산’을 뜻한다.
그는 “장애인 접근성 문제는 수익과 직접 연결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선순위가 밀린 것”이라고 지적하며 “해외는 게임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장애인 접근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 시중의 국내 게임은 이러한 해외 개발 가이드라인도 적용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MS 측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엔 4억명 이상의 장애인 게이머가 존재한다. 전문가들은 이제는 국내에서도 장애인 게임 접근성 개선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때라고 입을 모은다. 전문가들은 게임이 단순히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고 장애인의 자존감을 형성하고, 사회적 소통 통로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게임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사회 접근성 향성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지난해 콘진원이 장애인 게이머 327명을 조사해 발표한 ‘장애인 게임 접근성 제고 방안’에 따르면 응답자 대부분은 게임의 긍정적 효과로 ‘전반적 삶의 질 향상(69.1%)’과 ‘심리적 건강 증진(68.3%)’을 느꼈다고 응답했다.
박 씨 역시 아들 이 군을 통해 게임이 가진 힘을 실감했다. 박 씨는 “어느 날 게임 하는 충현이를 보고 동생이 ‘오빠도 이런 걸 할 수 있네’라고 말하더라. 충현이에겐 게임을 하는 것이 인정받는 기회다. 굉장히 큰 성취감을 느끼고 있다. 가족 간의 소통뿐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가 됐다”면서 “비장애인 아이들은 한 번에 할 수 있는 걸 이 아이들은 조건만 채워주면 100번이고 해서 자기가 장애를 이겼다는 경험도 하게 됐다”고 전했다.
박 씨는 “충현이는 반사 신경이 있다. 손을 올리면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아간다. ‘유사반사’라고 한다. 태블릿으로 게임을 하다 보면, 태블릿 PC가 중간에 있으니 화면을 누르게 되면 고개가 반대로 돌아간다. 그런데 게임이 재미있으니까 고개가 다시 돌아온다. 물리치료 선생님들은 충현이가 중심을 모른다고 얘기했지만, 결과적으론 게임이 장애를 이기고 게임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고개도 훨씬 잘 들게 됐고 목도 잘 가누고 손도 무언가를 잡기 위해 핀다”면서 “게임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쉽게, 재미로 접근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도 교수는 “게임을 하면서 스스로 결정한 무엇인가가 결과를 만들고, 그 결과를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장애인이 자기 존재를 인정받는 방식도 달라진다”면서 “게임은 대체 공간을 제공해서 자기의 역량과 잠재력을 안전하게 확인해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발달과 성장을 촉진하는 장면을 부여해, 일종의 사회적 기회를 제공한다. 장애인이 사회활동에 참여하면 사회 일원으로 공헌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도 교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게이머‘라는 공통된 정체성을 가질 때 보다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비장애인들에게 갑자기 장애인을 물리적 환경에서 직접 만나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수 있다. 하지만 같이 노는 과정에서 서로의 차이를 쉽게 알게 된다. 차이를 존중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라면 접근성 개선에 필요한 모든 옵션을 게임에 설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그런 선택 옵션이 개인 차이에 맞게 잘 커스터마이징 될수록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두루 혜택과 효용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낮은 장애인 게임 접근성이 더 이상 장애인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보건복지부가 19일 발표한 ‘2022년도 등록장애인 현황’을 보면 등록 장애인은 지난해 기준 전체 인구의 5.2%다. 지난해 등록 장애인 중 65세 이상의 비율은 52.8%였다. 2011년 38.0%에 비해 크게 늘었다. 게임 이용자들의 고령화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장애인 게임 접근성 문제는 곧 게임사의 생존과도 직결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개발사-장애인 등 다수 주체 지속적인 대화 필요
전문가들은 장애인 게임 접근성 개선을 위해선 정부 차원의 연구와 투자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콘진원이 발표한 ‘2022 게임 이용자 실태조사’에는 장애인의 게임 이용 현황과 관련된 연구나 조사항목은 포함되지 않았다. 장애인 게임 접근성 연구를 위한 기초적인 데이터조차 없는 셈이다. 업계 개발자들 사이에선 UI나 UX 개선과 관련한 정보가 극히 부족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해외 가이드라인이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이 콘솔 플랫폼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PC와 모바일 플랫폼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국내에 적용시키기가 쉽지 않다. 업계 한 개발자는 “장애 유형에 대한 정보, 장애인 게이머의 수요 파악도 안 돼 있어 개발에 어려움이 있다”고 털어놨다.
장애인 게임 접근성 개선이 정부의 몫만은 아니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여러 과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게임 접근성 문제에 자원을 투자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개발자, 장애인 가족 등 보다 다양한 주체의 지속적인 대화가 있을 때 게임 접근성 문제도 본격적으로 다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경혁 게임평론가는 “게임 ‘서울 2033’을 만든 반지하게임즈의 경우 보이스 오버(텍스트 인식) 접근성을 고려해달라는 한 시각 장애인의 요청을 받고 시스템을 개선해 시각 장애인 게이머의 비중을 늘렸다. 어떤 문제든 마중물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대화와 사회적 요구가 있다면 예상 밖의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문대찬, 성기훈 기자 mdc0504@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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