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DA현장in]②구소련의 황무지, 韓손길 닿자…여성 해방공간 '탈바꿈'
코이카와 정부 지원 유치원 건립
“막내아이가 5Km를 걸어 옆 마을인 아그라눔 보육원까지 가야했습니다. 유치원이 없었거든요. 이젠 마음 놓고 일터로 갈 수 있게 됐어요.” -학부모 아이다 크주 루스탐벡씨(33세)
키르기스스탄 오쉬 중심가로부터 34km떨어진 아라반군 유스포바면 숫콜마을. 이곳에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칼타주 에네 유치원’이 생기면서 마을 사람들의 삶이 달라졌다.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아이다씨는 “처음엔 이 공터에 유치원이 생긴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만들어줬다. 너무 감사하다”며 밝게 웃었다.
12일(현지시간) 취재진이 방문한 유치원 앞마당에는 연두색, 하늘색, 분홍색의 삼각 깃발이 펄럭였다. 박공지붕(책을 엎어놓은 모습의 지붕) 형태의 유치원 건물 창문에는 사과 나무와 꽃, 동물 모양의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아이들의 합창 소리도 들렸다.
1660㎡ 면적의 유치원 부지는 30여년 전만해도 구소련 시대 집단농장의 공동급식소가 있었던 곳이다. 키르기스스탄은 소비에트연방공화국에 속한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소련 해체로 인해 1991년 독립됐다. 독립 이후 32년간 국유지는 공터로 남아 있었다.
사회주의 시절 공동급식소..유치원으로 탈바꿈
한국 정부는 코이카 지원금 174만2500솜(약 2600만원)을 들여 이 곳에 유치원 건립을 지원했다. 마을 주민들이 4회의 걸친 회의 결과 유치원이 가장 필요하다며 지원 요청을 해왔다.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1인당 출산율은 평균 3명. 역내 국가인 우즈베키스탄(2.9명), 카자흐스탄(3.2명), 타지키스탄(3.3명)과 마찬가지로 높은 편이다. 유치원 건립은 곧 여성들의 일할 기회를 늘려주고, 아이들 보육환경 개선은 물론 고용창출 효과도 가져왔다.
유치원 정원은 60명.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아이를 맡길 수 있다. 유치원 교사와 시설관리인 등 15명이 고용됐다. 마을 주민은 월 6달러(약 8000원)의 원비를 내고, 일부 학비는 면 정부에서 지원한다. 한부모 가정 등 취약계층은 무료로 다닐수 있도록 했다.
나시리딘 압디라우이모프 유스포프면 면장(52세)은 “현재 57명의 아이들이 유치원에 등원해 학부모들의 자유시간이 생기니 다른 곳에 취업해 일을 할 수 있게 돼 마을 소득이 높아지고 있다”면서 “일자리 창출을 위한 고민이 많은데 이런 사업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딜다라 톨로노바 유치원장(38세)은 “올해 인근의 노루스 마을, 크즐 테파 마을에도 유치원을 더 지을 계획"이라면서 "코이카가 지원한 유치원이 좋은 선례가 됐다. 이제 면정부와 학부모의 지원이 있으면 유치원 설립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됐다”고 말했다.
여성 대상 금융 젠더교육 본거지로 활용되는 ‘다목적센터’ 건립
같은날 취재진이 방문한 카라 칼군 사리 카미쉬 마을에 생긴 ‘여성다목적’ 센터는 유치원 뿐만 아니라 교육문화센터로서 역할도 하는 곳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 곳을 아동돌봄공간으로 이용하면서, 금융 및 젠더교육, 여성 네트워킹 장소로 활용했다. 이슬람 문화가 강한 키르기스스탄은 남성들의 모임장소로서 모스크(이슬람 기도 공간)가 있지만 여성들이 커뮤니티를 모을 만한 장소는 없었다.
코이카가 200만솜을 지원하고, 면정부는 250만솜, 군정부 펀드 250만솜, 오쉬 주 280만솜을 합쳐 다목적여성 센터를 만들었다. 키르기스스탄의 전통 문화 중 하나인 아샤르(‘같이 일하자’는 뜻의 협동 문화)가 남아 있어 뜻을 합치고, 센터를 세우는데 도움이 됐다.
예리느시 톨토예프 오쉬 부주지사는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코이카와 면정부, 군정부, 오쉬 주가 돈을 모아 비전을 만들고 실현해나가는 것 자체가 키르기즈스탄의 ‘아샤르’다. 몇백년전부터 해오던 키르기즈의 아샤르 문화가 되살아나고 있다”고 했다.
여성 다목적 센터에서 호응도가 높은 것은 금융교육이다. 마을 리더들이 이곳에서 저축, 대출, 투자, 보험, 가계부 작성 원리 등을 가르친다. 지난해 9월 기준 키르기스스탄 총 저축률은 6.1%에 불과하다. 인근 국가인 카자흐스탄(44.9%), 타지키스탄(31%), 우즈베키스탄(28.7%)과 견줘서도 크게 낮다. 유목 전통이 강한데다, 사회주의 국가를 거치면서 금융이나 재정계획에 대한 국민 인식이 자리잡지 못해서다. 인구 600만의 작은 경제규모로 상당수 국민들이 국외이주노동을 선택하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이스마일로파 샤이르 카라쿨차면 의원은 “금융교육을 통해 자산 저축의 목적을 세우고, 불필요한 지출을 막고 저축하는 방법 등을 교육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성평등 교육도 이뤄지고 있다. 가정내의 성폭력 예방이나 평등한 성 역할을 가르친다. 키르기스스탄은 사회주의 문화가 남아있어 여성들의 고위직 진출이 활발하지만 '약탈혼(알라카추)' 풍습이 남아있어 사회 문제가 됐다. 이 때문에 키르키즈 공화국도 지난해부터 2030년도까지 ‘여성 인권 증진과 경제개발’을 위한 젠더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다목적센터는 곳곳에는 여성들이 생산한 수공예품들이 놓여있었다. 양털을 가공해 모직물을 짜고 카페트와 컵받침대, 모자 등을 만들어, 시장에 판매하는 것이다. 마따이바 아이굴씨(50세)는 “수공예품은 키르기스스탄의 만년설과 새, 산을 형상화한 무늬다”면서 “아이들이 이곳에서 맡겨지는 동안 저희는 시장에 팔 공예품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에리느시 톨토예프 오쉬 부주지사는 “키르기스스탄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정책들에 대해서, 코이카가 같이 지원을 해주니 여러 기회들이 생겨나고 있다”면서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키르기스스탄은 한국과 우호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해나가고 싶다”고 했다.
외교부 공동취재단(오쉬)·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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