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수 펑크’ 우려에도…與 압박에 유류세 환원 접었다
정부가 유류세(油類稅) 인하 조치를 그대로 연장하기로 한 배경에는 물가 부담을 우려한 여당의 압박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 부처가 정치 논리에 밀려 번번이 백기를 들었던 이전 정부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9일 당정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이달 초부터 이어진 국민의힘과 당정 협의에서 이달 말 종료 예정인 유류세 인하 조치 연장과 관련 “세수 부족이 우려된다. 최소한 유류세 인하 폭을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세수 문제는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 (유류세 인하 폭을 줄이면) 기름값 인상 충격이 우려된다”며 반대했다.
당초 기재부가 당정 협의에 올린 세 가지 안은 ①유류세 인하 폭 조정 ②유류세 환원(인하 종료) ③유류세 인하 그대로 연장이었다. 기재부는 이 중 세수 부족 문제를 다소 해결하면서 물가 부담도 덜 수 있는 ①안을 가장 유력하게 밀었다. 하지만 결국 당에 밀려 18일 유류세 인하를 8월 말까지 기존대로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당정 협의 중인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제 유가가 불안하다. 물가관리에 유념하라’고 지시했다”며 “유류세 대책의 초점이 세수 확보에서 국제유가와 물가를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31일 당정 협의에서 올해 2분기(4~6일) 전기·가스요금 인상 결정을 보류한 것도 유류세와 비슷한 사례다. 산업통상자원부는 공기업 누적 적자 등 재정 부담을 이유로 요금 인상을 추진했다. 당정 협의 전까지만 해도 요금 인상 결정이 나올 거란 전망이 우세했다. 하지만 역시 물가 부담을 우려한 여당의 브레이크에 막혀 인상을 뒤로 미뤘다.
정부의 경제 운용 무게추가 완연히 ‘물가 대책’으로 이동한 모양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11~13일(현지시간) 미국 순방 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유류세는) 국내 재정 상황도 고려해야 하지만 유가 불안에 따른 민생 부담을 다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전기·가스 요금 인상 문제에 대해선 “최종적으로 당에서 판단할 부분이다. ‘경기 대응’보다 ‘물가 안정’이 정책의 우선순위”라고 설명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기준금리를 동결한 11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통화정책의 최우선 목표는 물가 안정이다. 금리 인하 기대가 과도하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편성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당정 협의에서 정치 논리에 밀려 수차례 백기를 들었던 홍남기 전 경제부총리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홍 전 부총리 시절 기재부는 증권거래세 인하 반대, 1차 전 국민 재난지원금 반대,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 변경 등을 밀어붙였다가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을 설득하지 못하고 접었다.
불요불급한 지출부터 구조조정을 해야 하지만 경기 침체 상황에서 지출 절감을 밀어붙이기 어려운 ‘딜레마’에 빠졌다. 김유찬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는 “늘어난 나랏빚을 줄이려면 원칙적으로 유류세를 환원하고 전기·가스요금을 올리는 게 맞다”며 “긴축 재정을 펴야 하는데 최근 주요 정책마다 번번이 당에 밀려 ‘세수 펑크’ 우려가 가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설상가상으로 내년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선 포퓰리즘 대책이 고개를 들고 있다. 최근 여야는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추진 시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하는 기준을 완화하고 대구·경북 신공항 특별법과 광주 군공항 이전 특별법을 처리하는 데 합의했다. 김형준 배재대 정치학과 석좌교수는 “가뜩이나 최근 정부의 지지율 하락 때문에 물가에 부담을 주는 정책을 추진하기 어려워졌다”며 “총선이 다가올수록 인기를 끌기 어려운 세수 확보 대책에 대해 정치권의 브레이크가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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