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선마저 관광명물 됐다…지중해 보석, 비너스 태어난 이 섬
전 세계 여행자의 안식처로 통하는 지중해. 그 너른 품 안에 아직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섬이 있다. ‘지중해의 푸른 보석’이라 불리는 키프로스(영어 이름은 사이프러스)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가 태어났다는 신비의 섬으로, 유구한 역사와 전설이 뿌리내린 곳이다. 영롱한 에메랄드빛 바다와 느긋한 해변 풍경. 지난달 키프로스에 머문 일주일을 요약하는 장면은 대략 이랬다. 지중해를 굽어보며 활주로에 내려앉았고, 해안 길을 따라 걷고 또 드라이브했다.
지중해 바다에 풍덩
유러피안에게 키프로스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휴양지로 통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한 해 400만 명 이상이 방문했는데, 그중 절반이 영국‧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온 관광객이었다. 관광 가이드 알렉시아 크리스토둘루는 “키프로스만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종식되길 바란 나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키프로스에도 분단의 아픔이 있다. 1974년 분쟁 이래 그리스계 남부(키프로스)와 튀르키예계 북부(북키프로스)로 분리돼 오늘에 이른다. 전 세계에 문을 열고 있는 키프로스와 달리, 북키프로스는 튀크키예나 키프로스를 통해서만 입국할 수 있다. 북키프로스가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미승인국이기 때문이다. 한국 여권으로는 두 나라 모두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 여행에 큰 불편함은 없다.
키프로스의 바다는, 삼면이 바다인 곳에서 자란 동양인에게도 신기했다. 150개가 넘는 리조트와 호텔이 몰린 최대 휴양도시 ‘아이아 나파’에 ‘무산’이란 이름의 해저 조각공원이 있었다. 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닷속(최대 수심 9m)에 나무와 사람 등을 표현한 조각품 93개가 잠들어 있었다. 이 해저 숲을 탐험하는 다이버들을 물 밖에서 넋 놓고 구경했다. 한 전문 잠수부가 “2년 전 조성했는데, 벌써 전 세계에서 다이빙 명소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고 귀띔했다.
어느 날은 서부 바닷가에 버려진 거대한 난파선(에드로 3호)을 보며 일몰을 맞았다. 가이드 알렉시아가 “2011년 태풍 때 파손된 화물선인데, 지금은 지역 최고의 명물로 통한다”고 말했다. 녹슬고 기울어진 난파선 너머로 저물어 가는 태양을 보는 심경이 여러모로 복잡했다.
서쪽 땅끝마을 ‘폰타나 아모로사’에서는 ‘블루 라군’으로 가는 유람선을 탔다. 오래전 영화에서 브룩 실즈가 누비던 열대의 무인도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맑고 푸른 바다 빛깔만은 영화 속 풍경 못지않았다. 연안에 배가 멈추자, 유람선 관광객들이 하나둘 물속으로 뛰어들어 블루 라군의 여유를 즐겼다.
아프로디테를 찾아서
서남부 해안 도시 파포스에는 아예 아프로디테의 탄생지도 있었다. ‘아프로디테 바위’라 불리는 ‘페트라 투 로미우(Petra tou Romiou)’다. 그림 같은 연안에 들어앉은 육중한 바위인데, 이 바위틈에 인 물거품 속에서 여신이 태어났단다.
“보름달 뜨는 맑은 밤 알몸으로 이 바위 주변을 헤엄치면 불멸의 아름다움은 얻는다는 전설이 있다”고 알렉시아는 말했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로 눙치기엔 너무도 매혹적인 스토리텔링이었다. 허리 구부정한 노인도, 덥수룩한 수염의 아저씨도 아프로디테 바위 앞에서 근사한 포즈를 취하며 기념사진을 담아갔다.
‘파포스 고고학 유적지(198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의 대표 유적도 그리스 신화의 유산이었다. 이른바 ‘디오니소스 저택’에는 2~3세기에 만든 모자이크 장식이 500㎡(약 150평) 넘게 깔렸었다. 알렉시아는 “4세기 일어난 큰 지진으로 1500년 이상 묻혀 있던 것이 1962년 기적적으로 발굴됐다”고 설명했다. 바다의 신 넵튠과 아미모네의 비극적인 사랑, 독수리로 변해 어린 소년을 납치하는 제우스 등 그리스 신화의 명장면이 모자이크로 정교히 재현돼 있었다.
서부 아마카스 국립공원에는 아프로디테의 이름을 딴 트레일도 있었다. 떡갈나무가 우거진 2㎞ 길이의 숲길인데, 그 오솔길 끝에 아프로디테가 몸을 담갔다는 작은 연못(Baths of Aphrodite)이 있었다.
키프로스 어디서나 고양이를 만날 수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양이에 딸린 전설도 있었다. 먼 옛날 섬에 득실거리는 뱀을 잡기 위해 하늘에서 고양이 두 마리를 선물로 내렸다는 것이다. 예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아서인지, 다들 애교와 붙임성이 대단했다. 참고로 키프로스 고양이 품종을 부르는 이름은 ‘아프로디테의 거인(Aphrodite's Giant)’이다.
대를 이어온 멋과 맛
정해진 문양이나, 도면 없이 경험과 상상에 의존해서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것이 레프카라티카의 특징이다. 식탁보 하나를 만드는 적게는 석 달, 길게는 1년 이상 걸린다. 어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대대로 이어져 온 레프카라 고유의 여성 문화다. 대략 600년의 역사를 헤아리는데, 2009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도 올랐다. 레프카라는 고즈넉한 마을 풍경과 전통문화가 남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네 인사동이나 북촌 한옥마을을 연상케 하는 동네였다. 이곳에 늘어선 상점 중 반세기를 이어온 레프카라티카 가게에 들어갔다.
데모스루비스 사장은 “1481년 키프로스를 방문한 다 빈치가 레프카라티카에 감명받아 밀라노 대성당에도 선물하고 ‘최후의 만찬’에도 그려 넣었다”고 말하며, 각종 레이스 공예품을 선보였다. 큼지막한 식탁보부터 컵 받침, 베갯잇 등 없는 게 없었다. 어머니 툴라 루비스는 “기술을 가진 사람은 늙어가고 배우려는 사람은 적어서 큰일”이라고 했다. “열두 살부터 70년 넘게 레이스를 만들었다”는 그는 이날도 가게 앞까지 나와 앉아 바느질하며 손님을 맞고 있었다.
관광지 앞 풍경은 키프로스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어느 기념품 가게를 가도 사실 감흥이 없었다. 어딜 가나 아프로디테가 그려진 접시와 열쇠고리, ‘I ♡ CYPRUS’를 새긴 티셔츠가 넘쳐났다. 레프카라는 예외였다. 아기자기한 각종 레이스 보자기에 내내 마음이 흔들렸다.
지중해에서 건져 올린 갖은 해산물을 맛봤지만, 혀끝에 가장 긴 여운을 남긴 건 ‘코만다리아’라는 이름의 와인이었다. 키프로스에서도 와인을 만든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와이너리가 여럿 있는 정도가 아니라, 역사도 길었다. 현지에서 얻은 가이드 북에는 “문헌에 나오는 가장 오래된 와인으로, 무려 4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고 적혀 있었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아프로디테를 유혹하며 건넸다는 바로 그 와인이다.
와이너리에서 만난 한 직원은 “남부 트로이도스 산맥에 와이너리 14개가 모여 있는데, 이곳에서 생산한 포도를 사용하고, 또 2년 이상 숙성해야 ‘코만다리아’라는 상표를 달 수 있다”고 말했다. 맛은 어떨까. 솔직히 소주파의 입에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과일 향이 풍부한 달콤함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래도 코만다리아를 한 병 손에 쥐고 와이너리를 빠져나왔다. 역사도 스토리텔링도 과장이 세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신화의 땅에서 신의 술을 마신다’는 기분 좋은 최면에 빠져 있었다.
■ 여행정보
「
키프로스로 가는 직항 편은 없다. 카타르항공을 이용해 도하에서 갈아타면 대략 15시간이 걸린다. 인천공항에서 도하까지는 10시간 20분, 다시 키프로스 헤르메스 공항까지는 4시간 거리다. 화폐는 유로를 쓴다. 물가는 서울과 비슷한 편.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이 보통 3.5유로(약 5000원)다. 맥도날드는 빅맥 버거는 한국보다 대략 10000원이 비싸다. 시간은 한국보다 6시간이 느리다. 6월 초순까지는 밤낮으로 25도 안팎의 날씨를 유지한다. 코로나 관련 입국 규제가 사라져 추가 서류 없이도 입국할 수 있다.
」
키프로스=글·사진 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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