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고통은 참아도 굴욕은 못 참아

2023. 4. 20.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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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서양에서는 교양인은 정치와 종교를 식탁에서 이야기해서는 안 될 주제로 삼았다. 음식을 나눌 때 우리가 연대와 위로를 기대하는 것에 반해, 정치와 종교는 각 개인의 신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그 차이를 증폭시키기 십상이다. 그런 만큼 식탁이 가진 상징성이 부적절한 대화로 깨지지 않도록 이런 예절이 생기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낯선 이와 만날 때도 정치와 종교는 대개 환영받지 못하는 대화 주제다. 상대방과 관계를 깊게 해 줄 정보가 아직 부족한 만큼 낯선 이 앞에서 언행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연히라도 대화가 정치와 종교로 흘러가면 지금껏 지켰던 예의상 머뭇거림은 후퇴하고 그 자리에 확신과 단정의 언어가 자리 잡는다.

그리스도인과 식사하거나 만날 때라고 예외는 아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소중하다고 말하던 인자한 분이 우연히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돌변한다. 특정 정치 성향을 지지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될 자격이 없다든가, 심지어 교회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기도 한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보니 보편적인 하나님 형상과 개인의 정치적 신념이 어떻게 그리 연결되는지 추적할 겨를도 없다. 어색한 상황을 빨리 마무리하고자 시선을 아래로 깔고 조용히 밥만 먹거나 급히 인사를 마무리하는 소극적 저항만 할 뿐이다.

한 입에서 사랑의 언어와 전투적 언어가 함께 나오는 메커니즘이 뭔지 궁금했던 참에 흥미로운 논문을 우연히 접했다. 미국과 네덜란드 종교심리학자들이 집필한 ‘세계관 갈등 상황에서 종교적 성향이 차지하는 역할’에 관한 연구였다. 논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대부분 종교인은 비종교인보다 실존적인 문제를 더 잘 다뤘다. 즉 신앙이 있으면 죽음 앞에서 덜 불안해하고 고통에서 의미를 찾아내며 다른 문화에 관용적이었다.

그런데 연구 참여자들에게 그들이 가진 세계관에 도전하는 질문을 했을 때 흥미로운 반응이 나왔다. 세계관이 위협당하는 정보를 마주한 사람들은 당혹감 굴욕감 수치심 등을 표했는데 종교에 열심일수록 이러한 감정 표현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더 흥미로운 것은 부정적 감정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신학적 성향이 진보냐 보수냐 여부는 별 의미가 없었다.

이 연구는 통계로부터 나온 데이터 분석을 주목적으로 하지만, 갈등 많은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지에 관해서도 시사점을 준다. 신앙은 죽음 고통 도덕 등 삶의 여러 문제를 마주하는 지혜와 용기를 선물한다. 하지만 신앙이 깊어질수록 나와 다른 신념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에게 느끼는 부정적 감정이 강해질 위험이 있다. 달리 말하면 신학적으로 진보이건 보수이건 할 것 없이 종교는 ‘고통은 참아도 굴욕감은 못 참는’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사회적 삶 속에서 인간 마음이 이런 식으로 움직인다면 나와 다른 타자를 마주하고 함께 생활할 때 자연스레 생겨난 불편한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해진다. 자기방어적 언행으로 내 마음부터 편하게 만들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상대방도 느끼고 있을 부정적 감정까지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성숙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원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무엇일까. 다른 신념과 세계관 앞에서 본능대로 분노하는 것일까, 아니면 분노를 다스리는 것일까.

한국교회 위기를 타파하고자 신앙의 공공성을 회복하자는 외침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그렇다면 비그리스도교적 신념을 마주할 때 느낄 당혹감과 굴욕감, 분노를 다루는 기술 없이 공공성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염두에 둬야 한다. 타자와 함께 살 때 일어나는 부정적 감정을 평화롭게 다룰 수 없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 힘들다. 한쪽 뺨을 때림으로써 굴욕을 안긴 이에게 맞서 싸우지 말고 다른 쪽 뺨을 내밀라던 주님의 말씀을 세계관 갈등 상황에서 살아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이 식사 테이블을 풍성하고 느긋하게 만들어줄 벗이 되는 것도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마 22:39, 새번역) 방법이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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