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의 신 영웅전] 매월당 김시습의 탄식
우리는 가슴으로 사는가, 머리로 사는가. 영국의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은 1885년 케임브리지대 교수 취임사에서 “가슴이 따뜻하고 머리가 차가운 제자를 가르치러 왔다”고 말했지만, 성인이 아닌 바에야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퇴계는 사람은 ‘머리’(四端)로 산다고 했고, 율곡은 사람은 ‘가슴’(七情)으로 산다 했다. 역사에는 가슴으로 산 사람이 머리로 산 사람을 이긴 사례가 거의 없다.
조선 왕조에서 가장 뜨거운 가슴을 안고 산 사람은 매월당 김시습(金時習·1435~1493)이 아닐까. 수재로 소문나 세종대왕이 다섯 살에 그를 불러 오세(五歲)라는 호를 각별히 지어 줬다. 그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삼각산에서 사흘을 통곡한 뒤 책을 모두 불태우고 하산했다. 저잣거리에 널브러진 사육신(死六臣)의 시신을 거둬 묻어줬고, 천하를 떠돌다 경주 금오산에 정착해 시를 벗하며 살다 부여 무량사에서 열반했다.
논어의 첫 구절(學而時習之)에서 따서 이름을 지었는데 심유천불(心儒踐佛), 즉 마음은 공자요 행실은 부처처럼 살았다. 이런 그의 삶을 두고 율곡은 “백대의 스승”이라 우러렀지만, 퇴계는 “괴상한 사람”이라 여겼다.
김시습이 가장 혐오한 것은 정치하는 인간들의 탐욕과 불의였다. 그러면서도 정이 그리울 때면 서거정(徐居正)을 찾아가 가슴에 맺힌 한을 토로했다. 열다섯 살 연상인 당상관 앞에서 번듯이 방에 누워 다리를 벽에 세우고 말했는데도 서거정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숨지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 주먹질하며 “이 착한 백성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 못된 벼슬아치들 아래에서 저 고생을 하는가”라고 소리쳤다(율곡의 『김시습전』). 그런데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자꾸 여의도의 『강도 같은 귀족들(The Robber Barons)』(매튜 조셉슨, 1934년 작)이 눈에 어른거린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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