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나의 신앙]원우현(25) 평양 인기 배우를 만난 기분이….
김일성대 출신 몽골 유명 방송인 만나
“유물사관 같은 어둠의 영은 당장 떠나갈 지어다”
몽골 체류 3년 반 동안 현지인을 만날 때마다 기묘하면서도 영적인 사건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부활주일에 자이승 승전탑에 오른 할리웅 몽골 여 목사님은 동독의 방직 공장에 취업한 경험이 있었다.
한국 선교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그 실체를 탐구하던 중 목사가 되셨다고 한다.
목사님은 몽골에선 유명한 국제적 방송인 오윤체츠크 여사의 장녀였다.
모친의 언어 능력과 지혜를 물려 받아서 인지 한국어, 중국어까지 잘 구사했다.
세 자매의 맏이로 제일 총명했는데 두 여동생은 몽골 관광 사업으로 부유하게 산다.
김일성 대학을 졸업하고 유물사상을 신봉하는 모친 오윤체츠크 여사는 예수를 믿고 어려운 생활에 시달리는 할리웅 목사가 안쓰럽고 눈에 가시일 수 밖에 없다.
그녀에게 기독교는 공산주의나 유물 사상에 상치되니 용납할 수도 없는 노릇인 것이다.
거기다 목사의 길을 걷는 장녀가 경제적으로 자립도 못하니 말이다.
10세 아들 빌건과 함께 모친의 아파트 문간 방에서 신세를 지고 있으니 늘 안쓰러워했다.
한편 필자도 주일 예배 때마다 시내 복판 로얄 호텔의 빈방을 시간으로 빌려 예배를 보고 사용료를 지불하는 교회 형편이 안쓰럽긴 마찬가지였다.
교회 규모 확장 속도 만큼 헌금 등 재정 공급이 부족했다.
그래서 아멘축복교회는 바자를 열였다. 교인들은 바자에 참여해 봉사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바자 후에 팔다 남은 물건을 할리웅 목사님과 내가 각자 집으로 옮기려 같은 버스를 탔다.
여 목사님 짐이 너무 많아 나도 집까지 들어 드렸다.
아파트에 도착하자 할리웅 목사가 미안한 표정으로 잠시 차라도 하고 가시라고 권했다.
나는 무거운 짐을 아파트 안까지 들어 드렸다.
아파트에 들어서는 그 순간 벽에걸린 유럽식 장식 천이 눈에 띠면서 소박한 실내복을 입은 지성적이고 세련된 한 여인이 보였다.
바로 지성적이고 세련된 그 미인이 김일성 대학 신문학과를 61년 졸업한 국제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몽골 방송인 오윤체츠크 여사였다.
순간 왠지 나는 오히려 온 집안에 진동하는 무언가 사탄의 악령이 할리웅 목사와 나를 짖누르며 덤벼드는 것 같았다.
사탄 마귀가 꽉 차 숨이 막히고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수려한 유럽풍의 거실에서 악취만 느낀다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할리웅 목사는 남의 속도 모르고 나를 소개했다.
“어머니. 이 분이 대한민국에서 오신 원우현 장로이십니다. 저의 아멘축복교회에 실질적으로 장로 일을 전부 해주고 계십니다.
하늘이 보낸 분 같아요. 오늘도 빈민 구제 바자를 후원해 주셨지요. 제가 짐이 많아 들어주시다 집에까지 오셨어요.“
오윤체츠크 여사는 할리웅 목사가 나를 잠시 소개하자 놀랍게도 평양 사투리를 쓴다.
“장로님,그렇게 잘 도와주시니 감사합네다. 남조선에서 오셨다구요? 반갑습네다. 그런데 몽골에는 왜, 어디서, 무엇을 하러 오셨습네까?”
필자는 평양 여인의 표정과 몸짓까지 익숙한 모친을 보면서 신기한 듯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원우현 장로입니다. MIU 신문방송학과를 세우고 몽골 입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불쑥 들러 아무런 선물도 못가져 왔는데 예수님을 믿는 교인들은 기도로 하늘의 선물을 전하는 게 최상입니다.”
대답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여인의 머리에 손을 얹고 통성기도를 시작했다.
“이 집에 예수님이 임재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의 보혈로 온 집안 구석구석이 씻기여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오랜 세월 이 집에 둥지를 튼 할리웅 목사의 모친이 신봉해온 주체사상과 유물사관 같은 어둠의 영은 당장 떠나갈 지어다. 이 집에 살면서 모친 권세로 짓눌린 할리웅 목사님의 영권을 회복하여 주십시오. 이 집안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어서 하늘의 사랑으로 넘치도록 채워 주옵소서.”
기습적으로 손을 얹고 한국말로 소리를 내서 기도를 하고 나니 모친은 부동자세로 순간 숙연해졌다.
그러면서 “무슨 선물을 머리에다 주십네까”하고 웃는 얼굴로 딸 목사에게 원 장로가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할리웅 목사의 통역을 다 듣더니, 나는 오직 딸이 못 살고 고생하는 게 늘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고 했다.
교회 생활을 마땅치 않게 여겨 오면서 장녀 여목사님의 사상적 일탈을 질타해오던 그녀다.
몽골 앵커로서 인기가 높은 오윤체츠크 여사로는 당연하고 솔직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며칠 뒤 우리 부부가 오윤체츠크 여사가 좋아하는 한국 식당으로 만찬을 초대했다.
아내 이방숙 권사도 평양이 고향이고 테너 이인범 선생이 아내의 부친이라고 소개했다.
노벨상 후보작 ‘순교자’의 실제 인물이 순교하신 아내의 할아버지 이학봉 목사라고 하니 친밀하게 대화가 계속 됐다.
오윤체츠크 여사의 말문이 열리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이어갔다.
그녀는 북한 고아들이 몽골로 피난 왔을 때 돌보던 대표적 인물이었다.
오윤체츠크 여사는 북한의 치밀한 선발 과정을 거쳐 몽골인으로는 최초로 1961년 김일성대 신문학과에 입학했다.
주체사상을 신봉하면서 공산주의 언론관으로 선전 선동에 세뇌된 북한식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김일성 대에서도 특출해 졸업 후 북한 몽골 대사관에 근무할 정도였다.
북조선-몽골 상호 교류 행사의 일환으로 김일성이 몽골 방문시 동행했다.
노태우 정부 때 몽골 대통령이 한국 방문시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북한의 풍물이 생활 속에 녹아있는 그녀는 김일성 수령의 신봉자였다.
평양 말투는 물론 자태가 평양 인기 배우를 만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필자는 75세 나이에 몽골 선교지로 떠나기 전, 세상 것을 다 내려 놓으려 애를 썼다.
선교에 관련된 서적을 두루 섭렵했다.
그 중 기억이 나는 대목이 떠올랐다. 즉 1단계는 선교 대상이 가장 선호하는 음식을 나눈다.
서로 이해할수 있는 공통점을 화제로 삼았다.
2단계는 식사 초대 후 대화가 트이면, 특히 선교 대상자가 가장 잘하고 즐거워하는 장기를 자랑할 수 있도록 한다.
물고기를 물로 인도하듯, 유용한 선교 접근법이라는 문장이 문득 생각났다.
“오윤체츠크 여사님, 오늘 실례 많이 했습니다. 부탁 말씀 한가지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번 학기 MIU에서 ‘미디어 현대이론’ 과목을 강의 중입니다. 수강생 전부 몽골 학생들입니다. ‘몽골 미디어 환경과 생태의 과거와 미래’에 관해서 교수로서 도대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여사님의 40여 년 몽골 국영 방송(MNB)의 체험담을 후학들에게 들려주시길 원합니다.”
“아주 좋은 제안이십니다. 원 교수님을 위해서라기보다도 몽골 대학생과 몽골 미디어의 장래를 위해서 내가 한 번 나서야겠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고후 10:4)
정리=유영대 종교기획위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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