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질은 의외로 봄과 잘 어울립니다

율림 2023. 4. 19.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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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코씩 뜨고 안 되면 다시 풀고... 취미에서 배우는 인생사

당신 곁에 있을 수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합니다. 현재 조현정동장애(조현병과 우울증이 혼재된 정신질환)로 진단 받은 뒤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조현정동장애 환자는 2021년 기준 국내에 1만 2435명(건강보험심사평가원)입니다. 제 이야기를 통해 당사자들과 주변인들에게 힘이 되고자 하며, 조현병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인식 개선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기자말>

[율림 기자]

봄이 되면 푸릇푸릇하게 자라나는 풀들과 활짝 핀 꽃들을 구경하는 걸 좋아합니다. 특히 4월은 벚꽃 구경을 하는 계절인 만큼 기분이 좋아질 일이 자주 생기죠.

동시에 저는 4월과 봄이 가장 힘든 시기로 느껴지곤 해요.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석 달 동안 한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의기소침해집니다. 자연은 생기로 가득 차 있는데, 그 모습을 구경하는 나는 일 년의 사 분의 일을 보냈지만 이룬 일이 많지 않은 듯해요.

뜨개질이라는 취미를 찾았습니다 
 
 4월이 되면 벚꽃이 만개하고 사람들이 들뜨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을 앞에 두고 우울할 때가 있어요.
ⓒ AJ
그런 생각이 들면 기분이 좋지 않고 금세 침울해집니다. 그럴 때는 부정적인 생각을 돌리기 위해 가벼운 운동이나 독서를 하곤 해요. 그마저도 힘들어지거나 의욕을 잃을 때가 종종 찾아오지만요. 그럴 때는 뜨개질할 거리를 찾아 손을 움직입니다.

뜨개질은 조현병 증상이 나타난 후 집중 치료를 하던 시기에 시작한 취미입니다. 요즘에는 만든 작업물을 판매해도 될 만큼 자신감도 있고 작업물의 품질도 좋습니다. 처음 시작할 즈음에는 짜고 있는 직물의 안과 겉을 구분하지 못해서 뒤집어 뜬 적도 많았지만요.

뜨개질을 하다보면 내가 뜨고 있는 작업물이 제대로 되어가고 있나 확인하는 데 집중하느라 잡생각이 사라지는 편입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한 취미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제게 중요한 취미가 되었습니다.

뜨개질의 좋은 점은 많이 있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잘못 뜬 부분이 생겼을 때 풀고 다시 뜨면 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평소에 어떤 일을 실패하거나 잘못하면 전부 포기해버리고 싶어지곤해서요.

예전에는 요즘 많이 말하는 '게으른 완벽주의자'처럼 제가 하는 일이 완벽하지 않을 거 같아 시작도 전에 포기해버리곤 했습니다. 작업물의 완성본이 완벽하지 못할 거 같아지면 중간에 포기하거나요. 

뜨개질을 하면서 이런 단점이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잘못 뜨면 실을 풀면 되니까요. 그 과정이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 작업물을 고치는 과정에서 인내심이 많이 늘었습니다. 완성한 작품들을 보며 자신감을 얻어서 그 감정을 기반으로 뜨개질이 아닌 다른 일들을 할 힘도 얻구요.  

무엇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작고 큰 변화들이 생겨났습니다. 이젠 '게으른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부지런한 실수주의자'가 되었어요. 이전에는 제 작업물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게으른 완벽주의자였습니다. 잘못한 일이나 실수에 너무 엄격하게 자기 자신을 꾸짖었어요. 이런 생각이 과도할 때에는 입버릇으로 잘못했으니 죽어야한다고 말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어떤 일도 시작하지 못하고 의욕도 생기지 않았어요.

지금은 남들이 제 실수를 지적해도 행동에 대해 사과하고 '다음에 더 잘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실수나 잘못에 타인들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긴 하지만요.

'실수'는 내가 노력하고 시도했다는 증거
 
 실수와 실패를 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학습과 노력을 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 공포와 부정적인 생각을 걷어내야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어요.
ⓒ Brett Jordan
뜨개질을 하며 실수가 '틀린 것'이나 '잘못된 것'이 아닌, 그냥 단순한 실수이며 더 나은 행동을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행동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를 시도할 때 실수를 하면 '내가 이만큼 노력하고 시도했구나' 생각하게 되었어요.  

물론 현실은 뜨개질이 아니라서 실수를 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한 시간이나 타인과 쌓았던 중요한 신뢰 같은 것들이요. 그런 결과를 일으키는 실수들은 되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라 실수를 안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지만요.

그래도 일상을 살면서 하루하루가 뜨개질의 한 코라고 생각하면 일상의 사소한 실수들에 눈을 감을 수 있곤 합니다. 엉망진창인 오늘 하루와 잘못한 실수가 고통스럽긴 할 수 있어도 내일이 되면 더 나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어요. 
 
 뜨개질 중에서도 인형을 만드는 걸 가장 좋아합니다. 작고 귀여운 것들을 만들다보면 큰 작품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성취감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어요.
ⓒ 율림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막막한 날이라도 아무것도 안 하고 포기하는 날을 보내기보다, 뭐라도 작은 일을 하면서 오늘은 뜨개질처럼 딱 한 코만이라도 떠낸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뜨개질이 그런 것처럼 먼 미래에는 내가 이루고자 원했던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요.

4월에 피는 꽃들을 보면서 의기소침하긴 하지만, 전만큼 심각하게 침울하지는 않습니다. 일 년의 사분의 일이 지났지만 아직 뜨개질 작업물의 사분의 일밖에 뜨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요. 남은 사분의 삼 기간 충분히 작은 실수를 고치고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처럼 봄을 맞이해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 이 글을 읽으신다면, 올 봄에는 뜨개질과 비슷한 취미를 가져보는 게 어떠실까요? 그러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일들이 생기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루에 작은 한 코씩이라도 행복을 찾아서 기쁨으로 가득한 계절과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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