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주의 펀드 아쉬운 ‘절반의 성공’…‘보팅 파워’ 커졌지만 표 대결선 완패
지난 3월 주주총회 시즌은 행동주의 펀드의 맹활약으로 여느 때보다 관심이 높았다. 행동주의 펀드에서 내건 주주제안 상당수가 주총 표 대결에서 패배했지만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로 소액주주의 ‘보팅 파워(Voting Power)’를 높였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배당 등 주요 안건 부결
행동주의는 타깃 회사 주식을 집중적으로 사들인 뒤 적극적인 주주 활동으로 기업가치를 키워 차별적인 수익을 노리는 투자 전략을 뜻한다. 기업 전략을 수정하도록 요구하거나 운영의 개선, 효과적인 자산 배분, M&A 시도 그리고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압력 행사 등이 대표적인 투자 전략이다.
김규식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올해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 대상 기업이 된 기업을 크게 2가지 유형으로 분석했다. 우선, 수익거래 유형은 회사와 지배주주의 개인·가족회사가 재화·용역에 관한 수익거래를 통해 회사 재산을 침해하는 경우다. SM엔터테인먼트의 라이크기획, 태광산업의 유상증자 사례 등이다. 두 번째는 자본거래 유형이다. 회사와 주주 혹은 제3자 간 주식의 인수, 합병, 분할, 교환, 영업 양도 등 자본거래를 통해 주주 권익을 침해하는 경우다. 이 가운데 여론전에서 유리한 수익거래 유형이 다수였다는 게 김 회장 진단이다.
지난 3월 주총 시즌에서는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제안 대부분이 표 대결에서 아쉬운 성적표를 남겼다. 3월 말 기준, 주요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제안 10건 가운데 7건은 표 대결에서 졌다. 표 대결에서 승리를 기록한 곳은 3곳에 불과했으며 이 또한 감사나 감사위원 선임 등으로 제한적 의미의 승리에 그쳤다. 배당을 비롯한 기업가치 제고와 직결되는 안건은 거의 대부분 부결됐다.
개별 사례로 보면, 표 대결에서 받아들여진 안건은 대부분 감사·감사위원 선임으로 나타났다. 상법상 감사와 감사위원 선임의 경우 대주주 의결권이 3%까지만 인정되므로, 소액주주가 표 대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안건이다. 가령 지난 3월 말, 남양유업에 대한 차파트너스자산운용의 감사 선임안이 통과됐지만 배당 확대 등 다른 안건은 부결됐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의 감사위원 겸 사외이사 안건도 통과됐다. 다만 소액주주 측이 제안한 배당안은 부결됐다.
실질적인 의미의 승리를 거둔 곳은 얼라인파트너스가 유일했다. SM엔터테인먼트를 둘러싼 하이브-카카오 간 경영권 분쟁 끝에 카카오가 승기를 잡으며 얼라인은 이사회 구성안을 포함한 주주제안을 주총에서 통과시켰다. 이창환 얼라인 대표는 기타비상무이사로 SM엔터테인먼트 이사회에 참여해 의사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들 주요 행동주의 펀드 3곳을 제외한 나머지 행동주의 펀드는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유의미한 성과를 남기지는 못했다. 안다자산운용·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FCP)의 KT&G에 대한 주주제안은 완패했다. 배당금 확대와 자사주 매입·소각, 사외이사 선임안 등을 두고 표 대결을 벌였지만, 국민연금이 KT&G 이사회 쪽에 서며 모두 부결됐다.
BYC를 상대로 주주행동에 나선 트러스톤의 안건(배당금 증액·액면분할·감사위원 선임·자사주 취득)도 모두 부결됐다. 철강 제품 개발 업체 KISCO홀딩스에 500억원 규모 자사주 매입과 감사위원 선임을 요구한 밸류파트너스자산운용도 소액주주와 연대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배당 확대를 두고 주총에서 맞붙은 JB금융지주와 얼라인의 대결도 사측의 승리로 끝났다.
다만, 과거의 달리 부결된 안건도 주주들 찬성 비율이 높았던 점은 고무적이라는 평가다. 가령, BYC를 겨냥한 트러스톤의 주주제안 4건 찬성 비율을 보면 소액주주 중 70%가량이 동의한 것으로 파악된다. 태광산업에 대한 3개 주주제안 안건은 대주주와 특수관계인 지분율을 감안하면 소액주주 절반 이상은 찬성했다는 평가다. 얼라인의 배당 안건은 24%, 사외이사 선임 안건은 38%의 찬성을 얻었다. 황현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표 대결에서 5%의 지지로 지는 것과 20%로 패배하는 것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다”며 “주주들이 기업에 목소리를 내는 당연한 권리가 행사될 수 있는 흐름이 만들어졌다”고 평가했다.
이해관계자 포섭 역량 부족
부작용 완충 장치 마련될 필요
행동주의 펀드의 실질적인 성과가 다소 부진했던 것을 두고는 몇 가지 해석이 나온다.
무엇보다 행동주의 펀드 전략의 정당성(Legitimacy) 확보가 제한적인 수준에 그쳤다는 점이다.
이번 주총에서 행동주의 펀드가 패배한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로 구분된다. 국민연금이 반대했거나, 외국의 의결권 자문사가 반대한 경우다. 남양유업 주총의 경우 차파트너스는 ‘보통주 2만원, 우선주 2만50원 배당’을 안건으로 내놨다. 회사 측이 제시한 ‘보통주 1000원, 우선주 1050원’과는 무려 20배 차이가 난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단계적으로 기업가치 제고를 시도하는 전략을 펴기보단 미래 주주 가치 실현을 한꺼번에 반영하려다 보니 타깃 기업 내부의 시선과 괴리가 컸다는 분석이다. 이에, 국민연금이나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도 ‘현 경영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요구’라는 인식 아래 회사 측에 섰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적잖은 성과가 있었다는 게 시장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특히 주주제안을 안건으로 상장한 기업 숫자가 이전보다 크게 늘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기준, 3월 주총에서 주주제안을 안건으로 상정한 12월 결산법인 상장사는 44개사로 전년(28개사)보다 57% 늘었다. 올해 안건 수가 가장 많았던 이사·감사·감사위원 선임(27건)은 코스피에서는 지난해보다 승인율이 낮아졌고(28.6% → 15.4%), 코스닥에서는 전년 12.5%에서 올해 28.6%로 크게 높아졌다. 다만, 현금·주식 배당(25건)과 주식 취득(10건) 승인율은 0%였다.
시장에서는 행동주의 펀드가 내년에는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증시에 저평가 기업 비중이 유독 큰 탓이다. 블룸버그와 삼성증권에 따르면 지난 3월 15일 기준, 코스피 기업 가운데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미만인 기업은 67%로 3분의 2 이상을 차지한다.
전문가들은 행동주의 펀드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려면 부정적인 측면을 조정할 수 있는 완충 장치가 시장에서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행동주의 펀드를 바라보는 세간의 핵심적인 우려는 단기실적주의(Short-Termism)다. 주주 이해관계를 우선 고려하는 과정에서 기업의 장기 성장을 위해 미래 성장 기반이 되는 재무적 지출(Capex) 축소, 폭탄 배당을 통한 순현금 유출 등의 우려가 그렇다. 실제 단기적으로는 이런 가능성이 확대된다는 것이 학계 분석이다. 다만, 장기적으로 경영 성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실증적인 근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 견해다.
공개·적극적 개입 선호…韓, 3세대 행동주의 활발
행동주의의 첫 사례로는 1926년 미국의 가치 투자 대가인 벤자민 그레이엄이 노던 파이프라인(Northern Pipeline)을 향해 잉여 현금을 주주에게 배분하라고 압력을 넣은 사건이 꼽힌다. 이후 자본 시장은 빠른 속도로 발전했고 행동주의도 진화를 거듭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행동주의의 발전 단계를 크게 3단계로 나눈다. 미국 대공황 이전을 시작으로 이후 ‘기업 사냥꾼’이 활동한 1세대, 회사의 경영 전략에 영향을 미치는 2세대 그리고 최근 연기금, 사모펀드 등의 영향력이 확대된 3세대로 구분된다. 이 구분에 비춰, 2000년 이후 우리 자본 시장에서는 3세대로 분류되는 행동주의 펀드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우리 자본 시장에서 행동주의 펀드가 다시 주목받게 된 때는 코로나 팬데믹 국면에서 주식 시장의 구조적 변화와 맞물린 최근 1~2년 사이다. 대한항공을 상대로 맹공을 퍼붓던 강성부 펀드가 다소 초라하게 퇴장한 뒤 한동안 소강 국면을 보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개인 투자자가 폭증하면서 행동주의 펀드 행보에 다시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행동주의 펀드는 기업 의사 결정이 대주주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이뤄지지 않게 적극 견제에 나섰고 이런 행동이 개인 투자자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면서 판도가 달라졌다는 분석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05호 (2023.04.19~2023.04.2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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